[엄상익 관찰인생] 켄지가 정말 범인일까. FBI는 왜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있을까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이 글은 연재 형식입니다. 아래 관련 기사 항목에서 전편을 먼저 읽으면 더 재미있습니다. (편집자)
법원에서 사건기록을 복사해 왔다. 1350쪽의 방대한 분량이었다. 나는 그 기록 서재에 쌓아 놓고 꼼꼼히 보기 시작했다. 한국 경찰이 작성한 조서, 국립과학연구소의 감정서, 그리고 FBI의 서류들.
켄지가 정말 범인일까. FBI는 왜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있을까. 나는 사건 현장부터 시작해서 하나하나 거슬러 올라갔다.
2001년3월18일 아침 이태원 골목의 금성장 여관방에서 미국인 여대생이 처참한 시체로 발견됐다. 아래턱 뼈가 부러져 있었고 윗턱의 이빨도 부러져 있었다. 군화 밑창의 자국이 얼굴에 도장같이 박혀 있었다.
오전 8시 30분경. 이태원 파출소의 민순경은 서 내에서 아침을 먹고 나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근무를 교대할 시각이었다. 그때 외국인 남자 2명과 여자 1명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친구가 죽었습니다. 빨리 가야 합니다."
남자 중 한 명은 미처 신발도 신지 못한 듯 맨발이었다. 그는 민 순경의 팔을 잡아끌면서 재촉했다. 금성장 여관은 파출소에서 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여관에 도착한 민 순경은 외국인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여관 103호실로 들어갔다.
이십대쯤의 백인 여성이 피범벅이 된 채 나체 상태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는 시신을 살짝 만져 보았다.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방에서 나온 그는 여관에 투숙한 외국인들을 모두 102호실로 들어가게 하고 그들로부터 ID카드를 받아 두었다.
잠시 후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 과학수사계 현장감식반이 왔다. 그들은 프로답게 현장을 살폈다.
금성장 여관 103호실은 2평의 좁은 방에 침대 하나. 작은 텔레비전이 놓인 경대. 그리고 좁은 욕실이 있었다. 벽 아래에는 피가 튄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피비린내가 흐릿하게 허공에 남아 있었다.
백인 여성의 시신 이마와 목에 군화 바닥 같은 무늬가 찍혀 있었다. 뺨과 가슴이 멍들어 있었다.
화장실에는 죽은 여성의 바지가 팬티와 함께 놓여 있었다. 바지는 일부 물에 젖어 있었다.
2001년 3월 19일 용산경찰서의 형사과 신 경사는 사건 당일 금성장 여관에 있던 외국인 학생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죽은 여성과 같은 방을 썼던 24세의 여대생 애나로스였다. 네덜란드 마스트리히 대학 경제학과 4학년이었다. 최초의 목격자였다.
"사건이 일어나던 날 어떻게 지냈죠?"
형사가 물었다.
"네덜란드에서 한국으로 온 지 2주일 됐어요. 서울을 관광하고 새벽 2시에 돌아와 잠들었어요."
백인 여성이 죽은 시각은 몇 시쯤이었을까. 나는 기록 중에 들어 있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서류를 봤다. 죽은 여대생의 시체가 발견된 시각은 오전 8시. 발견 당시의 시신의 직장 온도는 33.4도. 여관방의 실내 온도는 24도였다. 문이 닫혀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살해된 시각은 새벽 3시쯤이라고 추정하고 있었다. 살해 당시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얘기였다.
"같은 방을 쓰던 사람이 죽은 걸 언제 알았죠?"
"아침 8시경 깨어났습니다. 방안을 보니까 시체가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나는 그 시체의 머리를 만지고 나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니?
"피를 보았습니까?"
형사가 물었다.
"아니요"
벽에까지 피가 튀고 죽은 제이미의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사건이 일어나던 밤 술에 취했어요?"
"아니요"
"깊게 잠드는 편입니까?"
"예 특별히 제가 아주 피곤할 때만---"
"자는 동안 어떤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까?"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거기까지만 얘기하고 나머지는 묵비권으로 일관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철저히 입을 닫았다. 나는 그 진술 부분에 클립을 끼워 넣었다.
죽은 백인 여성이 자던 옆방인 102호에는 21세의 핀란드인 마리아가 남자 친구 카티와 자고 있었다. 형사의 질문에 그녀가 이런 말을 했다.
"방음이 안 되는 여관의 여러 방에서 나는 섹스의 교성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어요."
이태원 뒷골목의 여관은 벽들이 얇았다.
"네 시경 무렵입니다. 옆방에서 누군가 '아-아'하고 얻어맞고 아픈 소리를 냈어요. 바닥을 구르는 것 같이 '쿵-쿵'하는 소리가 났어요. 오 분쯤 계속됐어요. 그리고 "
현장과 부합되는 진술이다.
"'렛츠 고'라고 미국인 억양으로 말하는 화가 난 듯한 소리도 들렸습니다."
나는 연필로 그 진술 아래 밑줄을 그었다. 범인의 소리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형사가 물었다.
"같은 방에 자고 있던 남자 친구 토마스를 흔들어 깨웠어요. 어떤 여자가 남자에게 두들겨 맞는구나 생각 했어요. 그런데 토마스와 나는 겁이 나서 나가 보지 못했어요."
같은 방에서 잔 남자 토마스의 진술도 마리아와 일치하고 있었다.
104호에 묵었던 네덜란드인 예런 쿨먼은 켄지와 같은 방을 쓴 학생이었다. 이런 진술이 있었다.
"켄지가 바에서 미군과 어울려 노는 것을 보고 거기서 먼저 나왔어요. 돌아와 금성장 여관 104호실에서 그냥 자고 나니 아침이었어요. 켄지도 옆에서 자고 있었어요"
52세의 여관 여주인 박종순은 새벽 3시30분경 금성장 여관에서 카운터를 보고 있었다. 평소 밤 11시면 남편이 교대해서 일을 하게 돼 있는데 그날 따라 남편이 고스톱 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네 번째 독촉 전화를 3시 30분경에 했다. 여주인 박종순은 카운터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그때 벽에 걸려있는 대형 거울로 문득 시선이 갔다. 누군가 103호실 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작은 체격의 백인남자였다. 계란형의 얼굴에 약간 통통한 편이었다. 밝은 색 점퍼 안에 체크무늬 와이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하의는 베이지색 계통의 면바지였고 신발은 황토색 랜드로바였다. 바지에 피가 묻어 있었다. 그 사람이 슬그머니 여관 밖으로 나갔다. 손님이 아니었다.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새벽 3시 30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사망 추정 시각과 비슷했다. 바지에 피가 묻은 백인남자? 나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과학수사연구소의 보고서를 찾아보았다.
과학수사연구소는 죽은 여대생의 혈액과 위 내용물을 채취해 확인했다. 특기할 약물 내지 독물 성분은 추출되지 않았다. 혈중 알코올 농도 0.11퍼센트였다. 그 정도면 약간 취한 상태였다. 자궁 경부에서 정액 반응은 음성이었다. 정액은 없었다.
경찰은 죽은 백인 여성과 함께 관광을 했던 대학생들의 혈액을 채취해서 마약 성분을 조사했다. 그들의 혈액에서 메스 암페타민, 코카인염 및 모르핀염 등 성분을 검출하지 못했다. 마약은 아니었다.
왜 같은 방에서 잤던 여대생은 철저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일까. 왜 경찰 조서에는 미군에 대한 부분이 빠져 있는 것일까.
나는 기록을 덮고 어두운 창 밖을 내다보았다. 죽은 여성의 시신이 누가 죽였다는 걸 말하고 있었다. 여관 주인이 옆방에 묵었던 학생들이 증언을 하고 있었다. 사라졌다는 백인 남성은 누구일까. 켄지는 왜 살인범이 되고 자백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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