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관찰인생]자백 하나로 뒤집힌 운명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연재 형식이니 아래 관련글을 먼저 읽으세요.

겨울 해가 저물어 가는 오후 5시경이었다. 빛이 바랜 낡은 머플러를 두른 중년의 백인 여성이 나의 법률사무소를 찾아왔다. 필리핀의 전도사가 부탁한 미국 여대생의 엄마였다.

"딸이 용산경찰서에 있어요. 도와주세요."

간절한 목소리였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종이 한 장을 내게 건넸다. 한글로 적은 내용이었다.

'제 딸 켄지는 절대로 남을 죽일 아이가 아닙니다.'

첫 문장부터 절박했다.

'범행의 자백 뒤에는 뭔가 있습니다. 켄지는 지금도 자기가 뭘 자백했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조사 받을 때 공황 상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사건이 일어난 지 일 년 후에 FBI가 켄지를 불법적으로 신문했습니다. 영장도 없었습니다. 딸을 호텔 방으로 데려가 조사했습니다.'

적법절차의 상징인 미국에서, FBI가?

'딸은 겁이 나고 혼돈 상태였을 겁니다. 켄지의 자백이 합법적이 아니라고 연방검사도 말했습니다. 조사한 요원은 세 명인데 모두 자격 미달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믿기 힘들었다. 나는 계속 글을 읽었다.

'한국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한국 경찰은 딸 켄지를 연행해 사흘 동안 정확히는 36시간 동안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혐의가 없다고 하면서 여권을 돌려주고 대한민국을 떠나도 좋다고 허락했습니다.'

언론 보도는 켄지가 미국으로 도망갔다고 했다. 엄마의 말은 달랐다. 나의 시선은 글의 다음으로 넘어 갔다.

'살인사건 발생한 시간 무렵 죽은 아이의 방에서 나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하는 증인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 그 시간 무렵 어떤 남자가 여관에서 나가는 걸 본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한국 경찰이 조사한 내용이라고 합니다.'

일단 필요한 조사가 된 것 같았다.

'반면 제 딸 켄지의 옷이나 신발에는 아무런 혈흔도 없었다고 합니다. 켄지를 살려주세요.'

한국 경찰이 수사를 끝낸 사건을 FBI가 왜 일 년 후에 다시 수사를 했을까.

"켄지가 정말 살인을 자백했나요?"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면 자백을 했다가도 번복하려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상했다.

"조사했던 사람은 전문 수사관이 아닙니다. 전혀 믿을 수 없어요. 심리적으로 최면을 걸었을지도 몰라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켄지가 변호사를 부르겠다고 했대요. 그런데 그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뭐라고 했습니까?"

"'변호사? 그럼 우리는 더 이상 도와줄 수 없어. 네가 협조하지 않으면 한국으로 보내질 거야. 거기선 사형이야.'"

협박이었다.

"FBI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가 물었다. 나는 미국 콴티코에 있는 FBI 아카데미에 가서 심포지움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미국인들의 FBI에 대한 신뢰는 대단했다.

"FBI를 많이 믿어 왔어요. 영웅인 줄 알았어요."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딸 켄지 문제를 닥쳐보니까 전혀 아니었어요. 특히 9.11 사태 이후 FBI는... FBI가 미국의 진짜 권력이에요. 그들이 원하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

나는 좀 더 확인하고 싶었다.

"켄지가 미국으로 막 돌아왔을 때 어땠어요?"

"불안해했어요. 뭔가 두려워하는 것 같았어요."

"죽은 여대생에 대해 어떤 말을 하던가요?"

"죽기 2주 전에 알았는데 남자 친구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제 끝났다고 슬퍼하더래요. 같이 클럽에서 술을 마시고 이태원의 여관방으로 갔대요. 묵는 방은 달랐대요. 다음 날 새벽에 죽어 있는 걸 같은 방에서 자던 학생이 돌아다니면서 알리더래요."

같은 방에서 자던 학생이 있었다. 살인 현장의 바로 옆에서. 한국 경찰이 그 증언을 놓쳤을 리가 없다. 그런데 왜 일 년 후에 FBI가 나섰을까. 그녀가 덧붙였다.

"미국에서 켄지를 변론하던 와이스 변호사가 관련 기록을 엄 변호사님에게 보내겠다고 했어요. 정치적 배경이 있는데 그걸 보면 참고가 되실 거라고 하면서요."

그녀는 딸 켄지가 용산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용산경찰서로 향했다.

용산경찰서 별관은 낡은 2층 벽돌 건물이었다. 어둠침침한 복도 옆으로 페인트가 벗겨진 회색 철문들이 줄지어 있었다. 나는 강력 4반으로 들어섰다.

달라붙은 철 책상 사이 의자에서 백인 여자와 근육질의 형사들이 짜장면으로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백인 여자가 켄지 같았다. 짜장면 냄새가 공중에 퍼져 있었다.

"켄지 스나이더의 변호사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눈이 부리부리한 남자가 일어나 나를 보았다.

"전 FBI의 한국, 일본, 홍콩 지역 책임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직함을 천천히, 강조하듯 말했다. 동아시아 전체를 관장하는 위치라는 걸 과시하는 것 같았다.

"잠깐 나가시죠."

그가 나를 데리고 건물 1층으로 내려왔다. 지나가던 견장에 무궁화 네 개를 단 경찰서장과 마주쳤다.

"수고하십니다."

서장은 FBI 지부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FBI 지부장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한국이고 한국 경찰서였다.서장의 모습에서는 비굴이 미국인의 얼굴에서는 오만이 엿보였다. 진짜 권력은 FBI 지부장이라는 한국계 미국인이 쥐고 있는 것 같았다.

"일 년 만에 덮었던 사건을 재수사하는 건 이례적인데 배경이 뭡니까?"

내가 물었다.

"죽은 여대생 부모의 항의가 대단했어요."

그가 잠시 뭔가 계산하는 눈빛이었다.

"스펙터 상원의원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이 사건을 거론했습니다. 죽은 아이의 부모가 상원의원실에 매일 찾아갔거든요."

그가 나를 똑바로 보았다.

"미군 장갑차 사건 이후 한미 관계가 좋지 않죠."

형사사건에서 왜 국제관계가 나올까. 그는 한단 계 위에서 나를 내려다 보는 눈빛이었다.

"미국도 공정하다는 뭔가를 보여줘야 하는 입장입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불쾌했다. '보여줘야 한다'는 표현. '정치 쇼'라는 소리인가.

"제가 미국으로 건너가 켄지를 조사했어요. 그리고 자백을 받아냈죠."

그가 시작점이었다. 그가 얻은 자백이 한국 재판의 핵심 축이 될 것이다.

"FBI가 한국경찰서에 왜 와 있죠?"

그가 지휘하는 느낌이었다.

"제가 여기 있는 거 이상하게 여기실 게 맞습니다."

그는 질문을 예상했다는 표정이었다.

"저는 미연방 수사국 요원 자격으로 와 있는 게 아니고 미국대사관 소속의 외교관으로서 와 있는 겁니다. 오해하지 마십쇼."

그가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진실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한국 경찰이 우리에게 협조를 요청했고, 우리는 친절하게 돕는 겁니다."

협조라는 이름의 지배. 요청이라는 이름의 명령은 아닐까. 나는 순간 깨달았다. 이 사건은 이미 시나리오가 있는 것이다.

"외교관으로서는 이 사건을 어떻게 보십니까?"

FBI 자격으로는 수사를 했다.

"스무 살 된 한 여자아이가 무죄라고 발버둥 치는데 미국 정부는 그 아이를 잡아서 한국으로 던진 거죠."

'던졌다?' 그는 어떤 입장일까.

"요즈음 한국에서의 미국 장갑차가 여중생을 죽게 한 걸 가지고 촛불시위가 대단합니다. 저는 이 사건을 통해 미국이 자국민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해당 국가로 보낸다는 걸 한국인들이 알았으면 합니다. 그게 미국과 우리 대사님의 뜻입니다."

미국인 한 명이라도 납치되면 대통령이 가서 데리고 오는 나라가 미국이었다. 무죄라고 절규하는 자국민을 분노가 들끓는 한국으로 던져버렸다. 내가 모르던 미국의 이면이었다.

그의 눈빛은 나도 협조하라는 암묵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내 입장을 분명히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나는 한국 법정에서 이 사건의 본질을 밝히고 수사의 적법성을 따지도록 하겠습니다."

FBI 지부장이 웃었다.

"한국 법정에서요? 재미있겠군요."

그의 웃음에는 오만함이 배어 있었다. 마치 한국 법정 따위는 자신이 얼마든지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확신 같은 것이었다.

나는 결심했다. 이 싸움은 켄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의 정치공작과 한국 사법주권의 싸움이었다. 미국이 피리를 분다고 한국이 춤을 추어서는 안 된다.

해가 진 어두운 복도를 걸어 나오면서 나는 주먹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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