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역 생활을 하고 나와서는 세상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집에 감옥의 독방하고 똑같은 시설을 하고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나는 주말이면 북한산을 자주 갔었다. 거기서 우연히 내 나이 또래의 교수를 알게 됐다. 학자답지 않게 성격이 호탕했다.
그가 나를 아버지의 팔순 잔치에 초대했다. 아버지는 그 행사를 사양했다고 한다. 아들은 친한 분들을 초청해 밥 한번 먹는 거라며 아버지를 겨우 설득했다고 했다.
나는 그 자리에 갔었다. 정계와 학계의 여러 원로들이 보였다. 먼저 서울대 교수 출신으로 통일부 장관을 했던 한완상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런 말을 했다.
"1970년대 명동의 한 식당에서 오늘의 주인공이 되는 분과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이 분은 긴급조치 시대에 자신이 한 일이 없다고 부끄럽다고 했습니다. 같이 민주화를 이루자고 겸손하게 말하시고 그걸 먼저 실천에 옮기셨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짧은 '서울의 봄'이 전두환에게 눌려버렸을 때 바른 말을 하시고 행동하다가 내란죄로 감옥에 가셨죠.
이분은 가슴이 뜨거운 분입니다. 동시에 머리는 냉철해서 시대의 현실을 예민하게 보십니다. 이 양반이 팔십의 나이에도 왜 사람들을 끌까? 그것은 원칙을 지키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꿈과 이상이 차이가 날 때 정치인들은 이상을 박살 냅니다. 그러나 이분은 원칙을 무시하는 정치에 중독된 분이 아니었습니다. 현실을 이상으로 끌어올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정치가 원칙을 벗어났을 때는 그걸 헌신짝처럼 버린 분입니다. 서도와 낚시로 나머지 인생을 보내셨지만 단순한 낚시꾼이 아니었습니다."
한 정치인이 행동으로 남긴 일생을 압축해서 표현한 말이었다. 내공이 보통이 아닌 사람들이 모인 자리 같았다. 나는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수첩에 메모하기 시작했다. 다음은 한승헌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선비의 본질이 머리 속에 꽉 찬 분이죠. 정치에 미쳐 선비의 길을 버린 분이 아닙니다. 평생 꾸준히 공부하는 분이었습니다. 독재에 반대해 싸울 때 이분이 썰렁한 저의 주머니를 채워주셨죠. 이분은 정계에 들어와서도 현실적 개인적인 이익보다는 이상을 추구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서울의 봄'이 왔을 때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위해 영남 정치인이면서도 김대중 선생 편을 들었습니다. 전두환과 싸울 때 이분은 일진이고 저는 이진이었습니다. 이분은 잡혀가 감옥에서 위급한 순간도 자신보다도 남을 위한 분입니다. 김대중 선생 사형만 면하게 해달라고 부탁한 분입니다.
나이 먹으면 왕년 얘기만 하는데 이분은 지금도 그런 분이 아닙니다. 이분은 '예'씨 집안인데 그저 '예 예'만 했으면 높이 올라갔을 텐데 '노'라고 해서 사서 고생한 분입니다."
나는 비로서 그가 누구인지를 알 것 같았다. 예춘호 씨였다. 그는 꽃길을 버리고 일부러 가시밭길만 간 것 같다고 할까. 팔순 기념잔치에 참여했였던 동아일보 사장인 김학준 씨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사람들은 권력과 돈을 보고 현실정치에 뛰어듭니다. 국민들은 그런 삼류정치인의 지배를 받고 삽니다. 그러나 원칙과 이념을 추구하는 일류들이 정치에 뛰어드는 순간이 있습니다. 독립운동이나 혁명의 시기에 그렇습니다. 이분은 일류정치인이었습니다. 본업이 선비인 분입니다. 그에게 정치는 부업이었습니다."
참석한 사람들의 말이 덕담을 넘어 정치 교과서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손님을 초청한 그의 아들이 일어서서 답사를 했다.
"아버지는 남들이 하나하나 올라갈 때 스스로 그 반대쪽으로 내려가셨어요. 박정희 대통령의 서슬이 시퍼럴 때 여당 사무총장을 하면서 대통령을 더 하면 안 된다고 반대했으니까요. 바로 당에서 제명이 됐죠. 아버지는 야당이 됐어요. 그런데 야당에서 정치자금을 요구하니까 그걸 뿌리치고 정치를 끝내고 재야가 됐죠.
전두환이 정권을 잡았을 때 반대하다가 내란죄의 주모자가 되어 감옥에 갔어요. 징역 생활을 하고 나와서는 세상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집에 감옥의 독방하고 똑같은 시설을 하고 거기 계시기도 했다니까요. 그 후로는 평생 하루에 서너 시간씩 먹을 갈고 글씨를 쓰셨죠. 아버지는 아마 한국에서 알아주는 명필이 되셨다고 생각합니다."
아들의 어조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이 배어 나왔다.
마지막으로 그날의 주인공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네 할아버지 같은 서글서글한 인상이었다.
"소찬이지만 즐겁게 드시고 가십시오."
짧은 그 한마디였다.
그 인연을 계기로 나는 예춘호 씨에게 나의 집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그는 오랫동안 고심을 하다가 '소소헌'이라는 세 글자를 붓글씨로 써서 보냈다. 처마에 은은한 달빛이 비치는 집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나는 그분에게 한번 점심을 대접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아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분이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난 것 같다. 그분은 내게 일류정치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주었다. 지금의 정치인 중 일류는 누구일까.
#예춘호, #김대중, #재야, #엄상익에세이, #엄변, #소소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