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조의 낭만] "호박 꽃도 꽃이더냐"고 꾀꼬리같은 목소리로 세레나가 노래하니

오늘도 인간을 위해 땀을 흘리는 호박들이 평등한 세상과 대우를 주장하며, 개선이 없을 시 누렇게 익어가는 것을 거부하는 '토()인간 격문'.

이역만리 멕시코에서 꽤 괜찮은 집안의 딸들로 태어나 꽤 많은 귀여움을 받고 자란 우리들은 쌩스기빙데이(감사절)에는 연극에도 자주 출연하는 괜찮은 배우였다.

동방예의지국인 한국에 어떻게 왔는지는 모르나, 유독 한국에서만 수박 참외 오이 멜론등과 다르게 왜 그리 심한 차별을 받고 살고 있는지를 잘 모르겠다.

우리들은 주막집에서 전을 지질때 산산히 잘게 조사져서 적절하게 사람의 입에 안기거나, 기껏해야 새우젓등과 버물려 나물 반찬 집안의 막내 딸 노릇을 톡톡히했지, 단 한번도 우리들의 권익을 위해 살아온 적이 없다.

반면 우리들의 선행은 가득하다.어느 가난한 집안의 며느리가 끓이는 된장국속에 들어가 반지락 육수를 뒤집어쓰며 조연 역할을 충실히 하였고, 우리들의 분신인 데쳐진 잎들과 함께 일 마치고 돌아온 이들의 허기를 달래주고 그들의 건강을 지켜주었다.

그들은 온갖 비바람과 벌레들을 견디고 무더운 날의 뜨거운 햇살을 받아 누렇게 뜬 우리들을 삶고 액기스를 빼내어, 신장이 나쁜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소임을 다 할 수 있는 마지막 순정의 기회를 부여하기도 했다.

우리들을 구박하고 미워하는 것은 역사상으로 보면 최근의 일이나 이제 다반사 보편화가 되였다. 그것도 모자라 채소에도 안 넣어주는 우리들을 "호박 꽃도 꽃이더냐"고 꾀꼬리같은 목소리로 세레나가 노래하니 우리는 어느 나라로 가라는 말이냐. 우리가 곤충을 잡아먹고 사는 육식식물이라도 되어야 한단 말이냐.

거기까지는 참겠다. 그런데 일도 잘하고 마음씨도 착한 당신 친구들을 왜 우리처럼 각지지 않고 둥글게 생긴 얼굴을 가졌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왜 우리 이름을 가져다 붙이며 깔아뭉개는 것은 더 이상 못 참겠다.

당신들이 언제 우리들을 위해서 물 한번을 줘봤느냐, 거름 한 조각 줘봤느냐, 그림을 한 번 그려주어 봤느냐.

우리의 항의는 아주 논리적이고 절실하고 구체적 타당성이 있다.

수박축제, 감자축제, 고구마축제, 양파축제, 귀신축제, 좋게 잘사는 산천어들 못 살게 하는 산천어축제까지 하면서 축제에 출전하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우리 호박꽃 축제는 왜 안 열어주느냐는 것이다.

무슨 아가씨들은 그리도 많이 뽑으면서 살림도 잘하고 건강미 넘치고 애도 잘 낳는 '호박꽃 아가씨'는 왜 안 뽑느냐는 것이다.

왜 우리보다 길쭉하게 생긴 수박도, 개구리 옷 입은 참외도, 우리보다 늦잠자고 꿀벌들도 돌보지 않는 배추나 무우도 애지중지 이뻐하면서 우리들만 왜 개 밥에 도토리 취급을 하느냐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여러분 인간들이 찬바람이 불어오기 전까지 대오각성하여 개전의 정을 보이지 않으면, 우리들이 지금까지 깍듯이 모셨던 인간들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누렇게 익어가 여러분의 일용할 양식이 되는 것을 거부하며, 만적의 난 처럼 반란을 일으켜 우리 호박들도 차별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 갈 것을 선언하며, 인간을 격하게 성토한다.

더불어 만약 당신 인간들이 찬바람이 불기 전까지 뚜렷한 대책을 제시하지 않으면, 우리와 비슷하게 생긴 맘씨 좋은 여성동지 분들만을 주인으로 섬기고 충성하는 조항을 신설하는 헌법 개정운동을 삼복더위에도 펼칠 것을 선언한다.

♧호박의 일생

애호박은 애기들 넙떡지 같다. 유순하고 야들 야들하다. 오월이 오면 그들은 나에게 입맞춤한다. 꼭 새우젓하고 같이 온다. 양파 좀 같이 넣으면 달짝찌근해진다. 너무 순해서 양념도 조심스럽게 한다. 빨간 고추로 멋을 내보기도 한다. 나는 애호박처럼 내말을 잘 듣고 부드러운 키스를 해주는 여인을 만난 적이 없다.

애호박이 여인네의 속살이라고 느낀 것은 바지락회 무침 때문이다. 나는 강진군 칠량면 청자식당의 막걸리식초에 무친 바지락과 애호박의 그 기막힌 궁합을 잊지 못한다.

곁에 나온 바지락 국에도 애호박이 들어있다. 애호박은 바지락 육수를 수줍은 처녀처럼 머금고 있다.

비가 내리는 날, 홀로 그 식당에 들렀다가 도암 논정댁 울엄마 손맛과 너무나 똑 같았다. 울컥한 생각에 잎새주를 세병이나 마셨다.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비에 젖었고 바람에 날렸다. 꽃 비가 가슴에 내렸다. 산길에 들어갔다가 어머니가 부르던 '바윗고개'노래를 불렀다.

여름이 짙어지면 풋호박이 제 철이다. 갈치찜 고등어 찜에 들어간 호박은 해체주의가 답이다. 이제 깡다구가 생긴 풋호박은 애호박과 차원이 다르다. 한 입 두툼이 입에 물면 육즙이 침샘을 자극한다. 갈치와 어우러진 그 맛은 빨간 고추, 고구마대와 함께 춤춘다.

돼지고기와도 풋호박은 잘 어울린다. 된장국과도 무척 잘 어울린다. 돼지고기는 겨울에는 김치와 여름에는 호박과 잘 어울리니 변덕쟁이다. 풋호박에 적당히 비게가 있는 돼지고기를 좀 두툼하게 썬다. 된장기 좀 풀고 고추장도 얼큰해지라고 같이 출전시킨다.

여름에는 풋 호박도 좋지만 몸에 좋기는 호박잎이다. 젓갈 쌈장에 한 잎 싸 먹는 맛이란!

가을이다. 작년에는. 서리가 올 때까지 늙은 호박을 따지 않았다가 남김없이 도둑을 맞았다. 쥐생원도 몇 개를 갉아 놓았다. 뭐 내가 키운 것도 아니고, 서창에 사는 김씨가 거저 먹으라고 준 것인데. 

몇 개를 따와 아파트 배란다에 진열하니 갑자기 부자가 된 것 같다. 호박 몇개에 호들갑이냐 하겠지만, 가슴 저 편이 차오른다. 벌써 호박죽 끓는 달짝지근한 냄새가 코끝에 아른댄다. 신장이 좀 안 좋은 진석이, 철수를 불러야겠다. 옛날 백조레스토랑 여주인은 지하생활로 신장을 버렸다가 호박으로 콩팥을 다시 살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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