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조의 낭만] 그런 것 안 중요하다, 느그들이 미쳤다. 미워하면 안돼야 안돼

*땡감

'너 오던 길에는 땡감나무 하나 없든?' 어머니는 누나의 빈 손 친정길을 은근히 비난하셨다. 술만 좋아하고 생활 능력이라고는 없는 매형 덕분에 곱디고운 누나의 손길은 거칠어져만 갔다.

얼마나 친정집이 오고 싶었을까. 인천에서 석양길을 걷다가 불현듯 찾아온 누나의 손에는 들린 게 없었다. 어머니는 훗날 외할머니가 자신에게 했던 이야기를 못사는 딸에게 잘 사라고 일부러 했다고 가슴아파 하셨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무런 사이일수록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차리라"고 했다. 사과가 익어간다. 꼭 홍옥같은 피부를 지녔던 우리 누나. 이제는 대추처럼 할머니가 되어간다.

*동백

이른 아침 할머니는 동백 기름으로 머리를 곱게 빚으셨다. 전주 이씨 집안에서 시집온 우리 할어니 이름은 꽃네다. 댁호는 동리 댁이다.

통이 대통이셨다. 머슴들 새경도 배로 주고, 옷도 한벌씩 더 주셨다. 할아버지의 바람기는 곤방 담배로만 삭혔다.

거지들을 보살피기를 좋아하셨다. 우리 집은 나병환자들의 보금자리였다. 인공때 전라도 땅 곳곳에 눈에 핏빛이 섰다. 사람들은 늘 남을 탓한다. 머슴들은 한을 풀었고, 또 당한 쪽은 무참히 보복을 했다. 계급 신분투쟁만큼 인간이 감춰진 한을 푸는 비극적 장면이 있을까.

동리댁 할머니는 울부짖으며 뛰어다녔다.
"내 말 잔 들어라, 내 말 잔 들어라, 그런 것 안 중요하다, 느그들이 미쳤다. 미워하면 안돼야 안돼"

그 미움의 강에서도 동리댁 할머니는 외나무 다리였다. 모든 것을 다 주던 할머니는 딱 백살을 사시고, 점심을 물에 놔 드시고 낮잠을 주무시듯 가셨다.

*모과

모과 만큼 천둥번개를 많이 맞는 과일이 있을까. 모과는 몸에 좋은 과일임에도 지내온 고생으로 얼굴에 기미가 심해 제 대접을 못 받는다.

그만둔 내 직장은 영세민들이 많이 모여사는 곳이다. 이분들 중 많은 분은 생활 보조금이 나오자마자 쌀 대신 술을 산다. 주로 소주다.

낙엽처럼 구겨진 육신을 이끌고와, 깡소주를 갈증을 달래듯 마신다. 자기들하고 마음이 통하다 느꼈는지 내 방에도 이따끔 집단으로 들렸다.

나는 술만 안 드시면 과자는 내가 마음껏 사드리겠다고 했다. 커피는 어쩌냐고 해서 좋다고 했다. 한분은 알콜 중독대신 커피 중독으로 바꾸어놓았다.

이춘택씨도 못 잊을 것 같다. 전북 무주 산골에서 소와 양을 키우다 읍내 선술집에서 소주 한잔 먹고 전두환 좀 씹고 야당 정치인 따라다닌다고 삼청교육대 끌려가서 인생 파장 끝장난 분이다.

청송교육대에서 불량 분자로 찍혀, 전방 근처 교육대로 다시 뽑혀갔고 킨타쿤타보다 더 모질게 두들겨 맞았다. 너무 힘들고 더러워 월북을 해보려다 잡혔다. 손까지 다 자르고 항거했으나 처절한 인간사육만 당했다.

늦가을 날, 이 선배가 나에게 말했다.

"내 인생이 꼭 모과 같아요. 향기도 물기도 다 사라지고 말라삐져 삐틀어진 늙은 모과,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약이 되겠지요. 근디 모과가 가슴 끓인 디에는 좋다 안 그러요. 가슴애피."

둘이 담배를 맛있게 나누어 피었다. 그 때 생각했다.  "산다는 것은 결국 모과처럼 늙어가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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