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해제를 거부했던 상해파 독립군들은 이루쿠츠크파 독립군과 소련 적군의 연합 공격에 의해 몰살

강호논객 한정석

육사 교정에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
육사 교정에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

러시아 문서보관소에는 1921년 스바보드니시(자유시)에서 있었던 독립군들의 동향에 대한 보고서들이 있다.

일단 착각하면 안될 것은, '자유시 참변'이 있기 1년 전에 '청산리 전투'가 있었는데, 이 전투는 독립군이 일본군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일본군의 공세적 토벌전이었다는 것이고, 독립군으로서는 열세에 의해 퇴각하면서 벌인 방어전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은 상당한 전력 손실을 입었다. 특히 탄약이 바닥났다.

이후가 문제였다. 청산리 전투에서 함께 했던 김좌진과 홍범도는 각각 자기 부대를 이끌고 있었다. 이때 소련의 코민테른이 약소국 독립을 지원한다고 하자 연해주로 가자는 주장들이 나왔다.

김좌진은 이에 반대했다. 공산주의자들 말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홍범도는 연해주로 가기로 결심한다.

당시 독립군은 매우 많은 분파들이 있었다. 좌우가 다 있었는데, 주로 고려공산당을 지지하는 독립군들이 연해주로 이동했다. 고려공산당에는 두 파가 있었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였다. 당연히 공산주의 지지 독립군들도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갈려 있었고 홍범도는 '상해파'에 편입되어 있었다.

문제는 이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독립군의 활동 영역이나 성향이 달랐다는 것이다. 이르쿠츠크파는 일찌감치 코민테른의 지원하에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상해파가 만주에서 이동해오는 상황이었다.

이르쿠츠크파 독립부대는 공산주의 이념 교육이 철저하게 되어 있었던 반면, 상해파 독립부대는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만주에서 조선인들을 협박해 군자금과 식량, 심지어는 아낙들마저 수탈하던 버릇을 연해주에서도 했다.

이것은 큰 실수였다. 소련은 이미 공산주의 혁명의 절대적 지지자였던 농민에 대한 계급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고, '나로트(민중)'라는 정치적 개념을 갖고 있었다. 이걸 상해파 독립군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만주에서 하던 습성을 그대로 했던 것이다.

당연히 연해주 조선인들이 반감을 갖고 공산당에 보고를 해서 코민테른과 소련 공산당은 이동해 온 상해파 독립군에 대해 불신이 있었다. 아울러 연해주를 기반으로 했던 이르쿠츠크파 독립군들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고, 상해파 독립군과 첨예하게 맞서기 시작했다.

1921년 소련은 연해주로 이동해 온 독립군들에게 스바보드니시로 집결할 것을 요구했다. 그렇게 집결하자, 소련은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이에 상해파 독립군들은 크게 반발했다. 독립군이 무장해제를 한다는 것은 항복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고 아무 조건도 제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은 스바보드니시를 떠나서 다시 만주로 이동하는 안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홍범도가 반대했다. 그러면서 상해파를 떠나 이르쿠츠크파로 옮겨갔고 소련 적군(赤軍,붉은군대)의 요구를 이행해 무장해제를 하고 소련 적군 영역으로 들어갔다.

결국 무장해제를 거부했던 상해파 독립군들은 이루쿠츠크파 독립군과 소련 적군의 연합 공격에 의해 몰살되는 지경에 이른다. 당시 소련은 장갑차, 야포, 심지어 탱크마저 동원했지만 이미 청산리 전투에서 탄약을 거의 소비한 독립군은 저항할 힘이 없었다.

이 문제는 심각한 것이었다. 이 과정과 배경에 대한 면밀한 추적이 필요하다. 왜 홍범도는 자신이 속했던 '상해파'를 배신했던가? 그리고 스바보드니시를 떠나자는 주장을 일축했던가. 홍범도는 소련 적군이 상해파 독립군들을 공격하리라는 걸 사전에 알고 있었던가. 이런 것들이 밝혀져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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