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죄과를 묻는 독립군 동지들을 소련에 부역한 공로로 레닌이 하사한 권총으로 사살했다는 설

육사 교정에서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철거될 예정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찬반 논란이 거세다.
국방부는 26일 “육사가 자유민주주의와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호국간성 양성기관으로서 군의 역사와 전통을 기념하는 교내 다수의 기념물 정비 방안을 검토하여 추진하고 있다"며 사실상 홍범도 장군의 흉상 철거 방침을 재확인했다. '독립군·광복군 흉상의 위치 적절성'과 ‘일부 인사의 소련공산당 가입 및 활동 이력'을 이유로 들었다.
일반인들에게 홍범도 장군(1868~1963)은 봉오동 전투의 주인공이다.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120명을 사살한 전과를 올린 것으로 알려져있다. 홍범도는 ‘청산리 전투’의 김좌진 장군 등과 함께 병력을 조직해 일본군과 싸운 상징적 인물이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1년 광복절에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카자흐스탄과의 회담으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해군 주력 잠수함인 '홍범도함(214급)'도 있다.
이런 영웅적인 인물 홍범도 장군이 왜 논란이 됐을까. 다음은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홍범도 장군에 대한 강호논객 한정석씨의 글이다. 정확하게 검증된 내용은 아니지만 독자들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편집자 주)
홍범도를 대한민국이 기릴 수 없는 이유는 그가 건국에 일조한 바 없는 '소련 귀화 공산주의자'라는 점도 있지만, 독립군사령관직이 탐나 이동휘와 경쟁하던 중에 동지들을 속여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을 소련에 팔아먹어 완전 궤멸시킨 인물이라는 설도 있기 때문이다.
그 죄과를 묻는 독립군 동지들을 소련에 부역한 공로로 레닌이 하사한 권총으로 사살했다는 설도 있으며, 독립군들의 응징을 피하기 위해 소련으로 도망가 귀화했다는 것이다.
거기서 홍범도는 소련에 의해서도 평가절하돼 카자흐스탄으로 유배됐고, 거기서 극장 수위로 살면서 여배우들과 어울리다가 숨졌다.
그로 인해 동북 만주에서 중국 팔로군과 패잔병 독립군이 손을 잡아 김일성을 만들었고 그런 마적떼가 '독립군 라이센스'를 갖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하겠다. 홍범도는 출신이 머슴이었다. 그가 독립군에 가담했던 이유는 주인을 때려 죽였기 때문인데, 이유는 새경이 밀렸다는 것이었다. 홍범도는 스스로 밝혔듯이 일제의 검거를 피해 도피처로서 독립군에 들어갔다.
시 독립군 지도자들은 거의 모두가 몰락한 양반 가문들이었다. 강골 장신 홍범도는 행동 대장을 할 수 있었다. 당시 별거 아닌 성과를 독립군 계파들은 서로 부풀렸다. 그래야 자기 계파의 주도권이 인정받고 커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독립군은 일본군 토벌에 밀리면서 홍범도는 함께 연해주 방면으로 이동하게 되고, 그곳에서 라이벌을 만나게 된다. 이동휘라는 인물로 문무를 겸비한 양반 후손이었다.
군사교육을 제대로 받았던 이동휘는 기독교 신앙인이었다. 인품과 지식이 뛰어났고 이미 공산주의 이론과 실천을 통해 정치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임정(臨政)도 그를 인정해 지도부에 편성했고 그를 추종하는 이들도 많았다.
연해주로 밀려난 독립군들은 무장력을 얻기 위해 소련에 접근했고, 이 과정에서 '상해파 공산주의자'들과 '이르쿠츠크 공산주의'들 간에 반목과 대립이 생겨났다.
이들은 서로 각기 다른 독립군 부대를 편성하고 있었는데, 홍범도 부대는 초기에 상해파 공산주의자들 편에 있었다. 그러다가 은근 슬쩍 이르쿠츠크 공산주의자들 편으로 이동했다.
같은 공산주의라도 유교적 유산이 강했던 양반 출신들의 상해파 공산주의자들은 주체성을 지키려고 들어서 한인 지원에 의존했지만,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던 이르쿠츠크 공산주의자들은 이미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음을 홍범도는 눈치챘던 것이다.
문제는 이동휘였다. 그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간에 연합을 위해 노력했다. 홍범도는 그런 이동휘를 제거할 기회를 얻으려면 자신은 이르쿠츠크파에 서서 상해파를 몰아내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홍범도 부대가 상해파를 배신하고 이르쿠츠크파에 서면서 독립군 내부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로써 홍범도와 이동휘는 암묵적인 라이벌 관계가 됐다.
당시 독립군 사이에 가장 큰 관심은 이동휘와 홍범도 중 누가 사령관이 되느냐였다. 하지만 둘의 차이는 현격했다. 레닌과 트로츠키 앞에서 홍범도는 러시아 말을 해야 했는데, '다, 니엣(예 아니오)' 두 단어밖에 하지 못했다. 반면 이동휘는 러시아어가 유창했고 공산주의 이론에도 해박했다.
당연히 소련이 이동휘의 자질을 알아보자, 홍범도는 초조했다. 양반 주인을 때려 죽이고 도피하기 위해 독립군이 된 홍범도로서는 또 양반가 출신인 이동휘의 수하로 들어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기도 컸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이 거느리는 추종자들에게 면이 서지 않는 것이었다.
’자유시 참변‘(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과의 교전)을 여기서 자세하게 쓸 수는 없지만, 홍범도는 소련이 연해주로 들어온 독립군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을 간파했던 것으로 보인다.
핵심은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들에게 소련이 무장해제를 요구한 것에 대해 홍범도 부대는 따랐고, 상해파 독립군 부대는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소련군의 진압에 홍범도 부대만 살아남고 모두 몰살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홍범도가 이르쿠츠크파와 무슨 거래를 했는지 역사적으로 밝혀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이 사건으로 상해파 입장에서 이르쿠츠크파를 통합하려던 이동휘는 완전히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련은 홍범도조차 사실은 신뢰하지 않았으며, 홍범도는 헛꿈을 꾸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홍범도는 상해파 독립군 포로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해 그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해서 상해파에 대한 소련의 숙청을 정당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역시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되어 극장 수위나 하며 몰락의 길을 걸었다. 사실은 급여도 넉넉하고 여배우들의 말벗이 되어주었던 편안한 삶이었다. 그는 독립군 재건을 하자는 고려인들의 건의와 요청을 묵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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