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격노하게 만든 이유가 무엇이든.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은 이 사람의 심정은 지금 어떠할까

무쇠주전자에 생수를 붓고 찻물을 꿇인다. 물 한 대접을 끓이려면 족히 10분은 걸린다. 옛날 초의선사와 같은 다인(茶人)들은 마당 귀퉁이에 화덕을 해놓고, 솔가지를 때워서 물을 끓였을 것이다. 전기포트에 후루룩 끓인 물과, 화학적 차이는 모르겠으나, 별다른 차(茶)맛이 난다.
부부싸움 끝에, 무엇 때문에 화가 치밀었는지는 모르나 애 낳고 산 마누라를 골프채로 때려서 죽인 정치인이 있었다. 그를 격노하게 만든 이유가 무엇이든.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은 이 사람의 심정은 지금 어떠할까. 7년 징역형이 너무 가볍지 않느냐고 비판의 소리가 높다. 자식들의 생모를 죽인 자가 7년이나 70년이나, 양형이 문제가 아니다. 그 고통은 수치로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사는 중에 분노(憤怒)로 인한 실수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실수 중에서 분노 때문에 야기되는 실수가 여파와 손실이 가장 크다. 직언하는 신하를 귀에 거슬린다고 사약을 내려 죽인 군주들 중에, 제대로 된 군주가 없다. 대개 비참한 말로를 맞기 마련인데, 최후의 순간에는 제 손으로 죽인 충복들의 얼굴이 떠올랐을 것이다.
화내기를 더디 하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다. 성경도 불경도 이 항목을 매우 중하게 말씀하고 있다. ‘성질이 불같거나’, ‘성질이 지랄맞은’ 유전자의 내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 분노의 문제만 잘 관리하며 일생을 살면 송덕비(頌德碑)가 설 정도로 칭송을 받을 수 있다.
‘성질이 불 같은’ 사람이 아니라 ‘성질이 천둥벼락 같은’ 사람에 징키스칸을 안 꼽을 수 없다. 징기스칸도 그 성정 때문에 실수를 많이 했는지, 아래 명언을 남겼다.
"화가 났을때는 아무 것도 결심하지 말아야 한다. 화가 났을 때는 아무 것도 해서는 안된다. '분노로 행한 일은 실패하게 마련이다. 설령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더라도, 벗은 여전히 벗이다."
월남 패망 당시, 늑대를 피해 소나무 꼭대기로 바람같이 달아나는 청솔모처럼, 베트콩들을 피해서 잽싸게 미국으로 탈출한 탁닛한이라는 중이 남긴 말이 있다.
"똑같은 상황에서 전혀 화를 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또 별거 아닌 일로 너무도 쉽게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내면에 들어있는 화의 씨앗을 보살피는 훈련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의 씨앗이 날로 커져서 나중에는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큰 손자가 어느 날인가 “내 평생 할아버지가 화내는 것을 단 한 번도 못 봤어요”하는 말에 가족들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그리고 잠시 뿌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딱 한 차례, 손자들 앞에서 할머니에게 역정을 내면서, 발밑에 있던 쿠션을 발로 차버린 일이 있다. 두 손자가 나를 올려다보는 눈이 동그레졌다. 그들의 그 눈동자는 내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나 또한 쉽게 잊지 못할 장면을 저들의 망막에 각인시켰구나.
무쇠주전자에 물이 다 끓으면, 바로 들어서 차 사발에 붓지 못한다. 손잡이가 뜨거워서 손을 덴다. 장갑으로 조심스럽게 잡아서 천천히 부어야 한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화는 주전자 안의 물처럼 어느 때나 끓어 오를 수 있다. 화를 다스리는 가장 쉬운 방법은 화가 났을 때 말을 안 하는 것이다.
무쇠주전자는 사용이 불편하다. 물이 끓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사용 후 방치하면 녹이 생기기에 항상 신경 써서 닦아 주어야 한다. 그러나 커피든 홍차든 여기에 차를 끓여 마셔 보라, 매우 비싼 고급차를 맛볼 수 있다. 시험해 보시라.
PS: 물론 분노를 무조건 다 삭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터뜨려야 할 때는 제대로 터뜨려야 한다. 특히 요즈음에는 더욱 그렇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