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관찰인생] 언제 내려놓을지. 무엇이 중요한지. 어떻게 작은 것을 나눌지.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서일규가 죽었어."
선배의 목소리가 침통했다.
"죽기 하루 전에 친구들 50명을 불러 밥을 샀대. 그리고는 미리 준비해 온 타이 핀을 친구들 한명 한명에게 걸어 주더라구."
그는 정말 다음 날 죽을 걸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모르고 한 것일까.
한여름 서일규 선배를 사무실 근처의 김영렬 선배 방에서 처음 봤을 때였다. 허름한 남방 셔츠에 수수한 바지를 입은 70대 영감이었다. 손때 묻은 낡은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의 고등학교 선배였다.
서일규 선배가 나의 양해를 얻고 내 사진을 찍었다. 이상했다. 그는 평범한 보통 사람 같았다.
일주일 후였다. 작은 액자에 담긴 나의 사진이 우편으로 전해져 왔다. 그가 보낸 것이다. 나는 그를 소개한 김영렬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받은 사진을 얘기했다.
"서일규는 버릇이 만나는 사람마다 사진을 찍어 선물로 보내줘."
재미있는 취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것이라도 남에게 뭔가 해준다는 것. 괜찮아 보였다.
"서일규 선배 뭐하는 분이예요?"
내가 물었다. 얼핏 보면 노년의 초라한 백수쯤으로 보이기도 했다.
"성수대교를 건너 강남으로 올 때 강변 옆으로 넓은 부지를 가진 레미콘 공장 보이지?."
"알아요."
강남 도심 한가운데 회색의 넓은 공장이 있었다. 아파트를 짓거나 땅을 팔아도 엄청난 금액일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레미콘 공장은 주변에 어울리지 않게 자기를 고집하고 있었다.
"그 레미콘 공장이 서일규 거야. 젊은 시절 그 사업에 성공했지. 서울의 건축은 다 그 공장에서 레미콘을 사서 썼으니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겠어? 지금은 사업을 아들에게 넘기고 노년을 편안하게 보내고 있는 친구지."
나는 40년 가까운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성공한 사람들을 봤다. 욕심은 끝이 없었다. 벌어도 벌어도 더 벌려고 했다. 아들에게 회사를 넘기고도 간섭하고 통제했다. 부자인 걸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서일규 선배는 다른 것 같았다. 그는 적절한 시점에 돈 벌기를 중단했다. 경영권을 깨끗이 넘기고 물러났다. 그리고 낡은 카메라를 하나 들고 사람들 사진을 찍어주며 살았다.
언제 그만둘지 알았고, 언제 내려놓을지 알았고, 무엇이 중요한지 알았던 것 같다.
왜 저렇게 사나. 그때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부자라면 그에 걸맞은 옷을 입고, 고급 음식을 먹고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돈은 그래서 필요한 것 아닌가.
하지만 그는 거기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수수한 옷, 낡은 카메라,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 보내주는 일. 그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사진 한 장을 인화하는 비용이 몇 천 원이다. 하지만 그는 그 몇 천 원짜리 선물을 평생 계속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거창한 기부도 아니고, 언론에 나는 나눔도 아니었다. 그냥 작은 선물이었다.
그제야 나는 이해했다.
죽기 하루 전 50명에게 밥을 사고 타이 핀을 하나씩 걸어준 것. 그건 갑작스런 준비가 아니었다. 죽음 앞에서 갑자기 달라진 것도 아니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마지막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진 찍어 보내주던 습관. 수수한 옷차림. 적절한 시점의 은퇴. 작은 것들의 나눔. 그 모든 것이 쌓여서 50명에게 밥 사고 타이핀을 나눠 주는 마지막이 된 것이다.
그의 죽음은 평생 나누며 살아가던 그의 마지막 발자국이었다.
그가 죽기 얼마 전 내 사무실을 놀러 왔었다. 그는 싱글싱글 웃으며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대우그룹을 만든 김우중이가 내 동기야. 그 친구 너무 야망이 커. 평생 쉴 줄을 모르는 거야. 종착역이 보이면 속도를 줄여야 하는데---"
나는?
욕심을 못 내려놓았다. 돈 되는 사건을 놓치기 싫어했다. 인정받고 싶어했다. 서일규 선배가 레미콘 공장을 아들에게 넘긴 나이에 나는 여전히 변호사 명함을 붙들고 있었다.
그가 카메라로 남의 사진을 찍어줄 때, 나는 내 사진이 신문에 나길 바랐다.
나는 그에게 배웠다. 언제 내려놓을지. 무엇이 중요한지. 어떻게 작은 것을 나눌지. 타이핀을 받은 50명의 친구들은 그가 준비한 죽음을 봤다. 나는 그가 준비한 삶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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