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을 떠난 뒤에야 시작된 삶, ‘벗는 연습’의 시간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내가 40대 중반쯤이었다. 법정에 있는데 70대의 선배 변호사가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절면서 들어왔다. 중풍으로 몸이 불편했다. 그를 보면서 아직도 돈을 벌어야 하는 형편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후 그 선배 변호사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외로 그의 통장에는 거액의 예금이 들어있었다고 했다. 손자가 할아버지의 돈으로 최신형 외제 스포츠카를 사서 타고 다닌다고 했다. 그런 돈이 있으면서 그 노인은 왜 그렇게 일을 했을까.
그 십 년쯤 후였다. 90대 노인 변호사와 함께 공동변론을 한 적이 있다. 노 변호사는 청력이 약해져 보청기를 끼고 있어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지금 판사가 뭐라고 했어?"
그 노인은 수시로 옆에 있는 내게 물었다. 그가 죽은 후에야 법률사무소 간판을 내렸다.
다시 세월이 흐르고 내 나이 육십대 중반을 넘겼다. 한 번은 방청석에서 재판을 지켜본 아내가 이런 말을 했다.
"법원 건물도 새것이고 판사도 검사도 전부 젊고 싱싱한데 당신만 늙었어. 어울리지 않아."
나는 아내의 말이 실감나지 않았다. 나의 백발과 골 깊은 주름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부터 판검사들이 왜 이렇게 아이같이 보이지? 라는 의문이 들었다.
변호사 배지를 달고 법정에 서 있을 때, 나는 살아 있는 느낌이었다. 작은 수입이라도 나는 여전히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늙어도 아파도 왜 법정을 드나드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 무렵 나보다 열 살 위인 한 변호사 선배는 이런 말을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양복을 입고 사무실로 출근해서 차 한잔하고 신문을 들어야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아. 일이 없어도 괜찮아. 집에는 못 있겠어."
변호사라는 직함이 정체성이 되어 버렸다. 수십 년 사용하던 사무실과 책상이 내가 되어 버렸다. 변호사만 그런 게 아닌 것 같다.
교수로 있다가 퇴직을 한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젊었을 때는 수업을 하기 싫어서 휴강을 하기도 했지. 그런데 말이야. 퇴직을 하고는 돈을 안 받아도 좋으니까 강의를 한 시간만이라도 달라고 사정을 한다니까."
정년퇴직을 하는 교수 중에는 자기 연구실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버티는 사람도 있었다.
시력이 약해져 거의 보이지 않게 된 탤런트가 방송에 나와 고백을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눈이 안 보여도 계속 연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녹음한 걸 들으면서 대사를 외웠어요. 무대를 더듬고 돌아다니면서 미리 소품들의 위치를 익혔어요."
그에게 연기는 무엇일까.
며칠 전 사법연수원 동기인 변호사를 만났다. 머리가 하얗게 바래고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당뇨가 심해져서 눈과 다리가 불편해졌어. 확대경을 놓고 서류를 봐."
그는 조금 떨어진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법정에 가서 기다릴 때면 젊은 경비원이 다가와서 '괜찮으세요? 변론 하실 수 있어요?'라고 묻기도 해."
수액이 말라 쓰러지기 직전의 고목 같은 그는 아직도 일을 붙잡고 버티고 있었다.
평생을 달리기만 해왔던 우리들은 정지가 불가능한 것인가? 내남없이 법정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곳이었다.
4년 전, 천직으로 여겼던 변호사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더 이상 나는 현실과 맞는 사람이 아니었다. 변호사라는 것은 내가 오랫동안 입고 있던 옷이라는 생각이었다. 벗기로 했다. 돈 버는 일도 그만두었다. 70대의 백수는 욕먹을 일이 아니다. 서울이라는 내가 묶여 있던 장소를 떠났다.
아침에 일어나 성경을 읽고 글을 쓴다. 오후에는 하얗게 밀려오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산책을 한다. 이따금 찾아오는 예전의 의뢰인이 지금은 영혼의 친구가 된다.
겹겹이 걸치고 있던 옷들을 하나하나 벗는 중이다. 늙은 몸도 버리고 갈 낡은 옷은 아닐까. 다 벗으면 무엇이 남을까?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허무가 남을지도 모른다. 칠십을 훌쩍 넘은 늙은이는 한밤중 검은 밤바다 위에 걸려있는 노란 달을 무심히 올려다 본다.
황혼의 삶을 어떻게 할까는 각자의 선택이 아닐까. 비바람이 불어도 그가 존재하던 나뭇가지에 끝까지 매달려 있을 수 있다. 스스로 아직 윤기 있을 때 낙엽이 되어 땅에 떨어질 수도 있다. 나는 곱게 물든 낙엽이 꽃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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