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겨울옷을 입은 게 너무 빠른지 아니면 그 선배가 아직도 여름옷을 입고 뛰는 것인지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오랜만에 서울에 와서 몇 명의 변호사들과 점심을 했다. 한 중견 로펌의 대표를 하는 80대 초반의 선배가 점심을 먹는 중간에 전화를 받고 말했다.
"기사가 다음 약속 시간에 늦는다고 빨리 내려 오시라고 재촉하네. 정말 미안합니다. 먼저 가 봐야겠어요."
오랜만에 만나 정담을 나누는 자리였다. 80대 초반의 나이에도 그렇게 시간을 쪼개서 사는 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동해 바닷가에서 살고 있다. 인생의 종착역을 앞두고 삶의 속도를 줄이고 있다. 모처럼 선배들을 만나 정담을 나누려고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 나이에도 바쁜 그 선배를 보니까 일종의 부러움이 들었다고 할까.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쓰는 그에게 나는 만나야 할 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80대 초반의 나이에도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약속에 응하고 스케줄을 소화하고 다음 일정을 향해 나아간다. 그 선배는 평생 무언가를 채우는 삶을 살아온 것 같다.
이십 년쯤 전이다. 그 선배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지. 서울법대 다닐 때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엘리트들이 가는 중앙부처 사무관이 됐어."
출세가 보장되는 궤도 위에 있었다. 그러다 사법고시를 치고 검사가 됐다. 그는 우리 시대 법조계의 신화 같은 인물이었다. 살아있는 인명사전이고 역사책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공영방송의 시사 프로그램 사회자가 됐다. 박식하고 유창한 달변인 그는 단번에 프로그램 시청률을 높이고 사회 명사가 됐다. 정계 진출이 언론에 거론되기도 했다. 그 후 로펌의 대표가 되어 지금까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면서 그 선배와 시간이 정지된 동해 바닷가에 사는 후배인 나를 비교해 보았다.
그 선배는 타고난 재능에 명예, 부, 지위를 모두 갖추었다. 평생 세상에서 뛰었고 올라갔고 무언가를 채웠다. 나는 재능도 체력도 모자란 걸 알고 중간쯤에서 완만한 경사를 따라 스스로 내려왔다. 그리고 세상에서 떨어져 나와 동해 바닷가에서 성경을 읽고 시편을 필사하고 글을 쓴다.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를 하고 확장이 아니라 수렴하는 삶을 산다고 할까. 내면과의 화해를 도모하고 죽음을 준비한다.
그런데 그 선배를 보면, 멈추지 않는 것도 하나의 답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80대 초반에도 여전히 필요한 사람으로 사는 것. 그것도 축복 아닐까.
내가 겨울옷을 입은 게 너무 빠른지 아니면 그 선배가 아직도 여름옷을 입고 뛰는 것인지 판단이 안 된다. 어쩌면 둘 다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세상의 시간보다 영혼의 시간을 살고 싶다. 멈추고 싶다. 약속을 다 지키지 않아도 생산적이지 않아도 괜찮은 건 아닐까.
그런데 동시에, 80대에도 여전히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 그것도 나름의 은총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가 선택한 길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다. 다만 그 선배를 보며 생각한다. 인생에는 여러 계절이 있고, 어떤 이는 가을에 쉬고 어떤 이는 겨울까지 일한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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