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글 향이 기도가 되어 아버지에게 갔으면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2026년 3월 5일. 오전 9시 55분 창으로 햇빛이 비스듬히 비쳐 들어온다. 잔잔한 바다가 유리 조각 같이 햇빛을 퉁겨내며 반짝거린다.

오늘은 아버지의 기일이다. 해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나는 제사 대신 글을 써 올린다. 향 대신 글 향이 기도가 되어 하늘에 오르라고.

며칠 전 꿈에 아버지가 나타났다. 돌산 위에 지어진 양옥집 거실이었다. 소파에 앉은 아버지는 그윽한 눈길로 바닥에서 기어다니고 있는 손자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37년이 지났다. 내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시려는 것일까.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일까. 꿈에서라도 보면 반갑다.

기억의 우물 바닥에서 아버지와의 추억을 이리저리 찾아본다. 나도 나이가 먹으니까 점점 희미해지는 것 같다. 아버지가 저 세상으로 건넜을 때보다 나는 벌써 열 살이나 더 먹었다. 그때는 아버지가 살만큼 산 것으로 생각했는데 노인이 되니까 너무 젊은 나이에 죽은 것 같다. 더 사시지. 

아버지는 죽기 직전 내게 "고희까지만----"이라고 하면서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더 살고 싶었다. 그러면서 체념하고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게 인간이 아닐까.

어제 죽은 사람이 소원하던 내일이 바로 오늘이다. 나는 그 오늘을 살고 있다. 그분이 주신 선물로. 그 선물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 아버지가 보지 못한 날들을 내가 대신 살고 있다. 하얗게 밀려오는 파도.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 죽은 아버지에게 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다.

우리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려서 아버지가 동네 선술집에서 다른 사람들과 술을 마실 때 더러 옆에 있었던 적이 있다. 드럼통을 잘라 만든 화덕의 가운데 있는 연탄에서 새파란 불이 올라와 몸을 흔들곤 했다. 석쇠 위에서 노릇노릇 구워지던 돼지 고기의 고소한 냄새가 지금도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난 함경도 주을에서 태어났어. 온천이 있고 전쟁을 피해 온 러시아 부자들이 많이 살 던 곳이지."

왜 거기서 났을까. 알 수 없다.

"어려서 살기는 훈춘에서 살았어. 아버지가 마방을 했지. 말을 보살피라고 일을 군대에서 하청 받은 거야. 내 할아버지도 그 일을 한 것 같아. 나는 일곱 살 때부터 말을 탔어. 운동을 시키려고 말이야."

아버지는 해방 후 대학을 다니면서 기마 대장을 했다. 말 타는 데 능숙하기 때문이다. 그게 좌익 학생들에게 부르주아로 보였던 모양이다. 북한군이 서울로 진주하자 완장을 찬 좌익학생들이 아버지를 잡으러 왔었다. 그 후 아버지는 군대에 갔다.

내가 대여섯살 무렵 아버지는 양철 쟁반 위에 막소주 됫병을 올려놓고 마시면서 6.25 전쟁 얘기를 하곤 했다.

"우리 사단이 청진까지 치고 올라갔지. 진지에 갇혀 있으면 밥을 먹을 수 없을 때가 많았어. 그럴 때는 다이너마이트가 떡처럼 보였어.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맛이야. 그걸 먹기도 했지."

아버지는 하얀 소주가 든 술잔을 입 속에 털어 넣었다. 그런게 전쟁인 것 같았다.

"난 어려서 자랄 때 항상 중국 밀가루빵과 된장을 풀어 넣은 국을 먹었어."

어린 나는 아버지가 왜 밥을 먹지 않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중국에서 사니까 그렇게 했나보다라고 생각했다. 나중에야 술잔의 반은 아버지의 눈물인 걸 알았다.

"중공군이 들어오고 전선이 밀리니까 원산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왔지. 군 트럭 뒤에 타고 거리를 지날 때 보니까 눈이 돌더라구.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어. 춤추고 노래하고 먹고 마시고. 모두 안전하고 행복해 보였어. 난 가족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애들은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고 전쟁에 잡혀갔는데 말이야. 모두 총을 쏴 죽이고 싶었지."

화가 난 아버지의 충혈된 눈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최전방 철책선 부대에서 근무했다. 눈 덮인 전선에 있다가 서울로 휴가 가면 아버지와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 룸쌀롱에서 정치를 논하는 고교 동기를 보면서.

창 밖으로 해안로를 따라 서 있는 소나무들이 강건한 초록으로 우뚝 서 있다. 동해항의 긴 방파제 끝에 서 있는 무인 등대가 근육질의 작은 남자가 돌아 앉아 있는 모습이다. 저 세상에 사는 꿈속의 아버지도 나와 같이 이제는 저 잔잔한 파도를 볼까. 오늘의 글 향이 기도가 되어 아버지에게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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