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의언론=박주현 재담 엔터테인먼트 대표]

정치판에서 '선명성'이라는 단어 만큼 유혹적인 것도 없다. 회색지대에 서지 않고, 아군과 적군을 명확히 가르는 태도는 결기 있어 보이고 때론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시선을 잠시 돌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이후 축적된 생물학적 연구들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하나의 서늘한 절대 법칙과 마주하게 된다. 바로 유전적 다양성을 잃은 종족은 멸망을 피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바나나를 보자. 우리가 먹는 바나나가 멸종 위기인 이유는 그들이 모두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클론이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바이러스만 창궐해도 전멸한다. 자연계에서 '순수함'이나 '통일성'은 자랑거리가 아니라, 멸종으로 가는 급행열차 티켓이다.
그런데 이 섬뜩한 법칙이 비단 생물에게만 적용될까. 필자는 이것이 민족이나 국가, 하물며 정당의 생존 원리와도 맞닿아 있다고 믿는다.
가장 극적인 사례가 바로 2024년, 영국 보수당의 몰락이다. 창당 190년,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집단이라 불리던 그들은 정확히 이 '다양성의 상실' 때문에 무너졌다. 비극은 브렉시트라는 거대한 이슈 앞에서 지도부가 '사상 검증'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들은 당의 노선에 100%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불순분자'로 낙인 찍었다.
2019년의 숙청은 상징적이었다. 보리스 존슨 총리는 이견을 보인 당내 중진 21명을 하루아침에 출당시켰다. 그 명단에는 윈스턴 처칠의 외손자인 니콜라스 소임스도 있었다. 보수의 아이콘인 처칠의 핏줄마저 "너는 진짜 보수가 아니다"라며 내쫓은 것이다.
유능하고 합리적인 목소리가 거세된 당에는 맹목적인 충성파와 극단주의자들만 남았다. 당은 선명해졌지만, 유전적으로 취약해졌다.
그 결과가 바로 '리스 트러스' 사태다. 그녀는 "진짜 보수의 가치로 돌아가야 한다"며 현실을 무시한 이념적 순결성을 고집했다. 결과는 파운드화 폭락과 국가 부도 위기였다. 타블로이드지는 "총리의 임기가 길까, 양상추가 썩는 게 빠를까?"라며 내기를 걸었고, 승자는 상추였다. 다양성이 사라진 조직이 얼마나 멍청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잔혹한 코미디였다.
결국 보수당은 선거에서 역사적인 참패를 당하며 소수 정파로 전락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필자는 우파 내부의 복잡한 역학관계나 그들만의 사정은 잘 모른다. 누가 누구와 친하고, 누가 정통인지는 필자가 알 바 아니다. 필자는 그저 호오(好惡)가 없는 제3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는 관찰자일 뿐이다. 그래서 가끔 "아, 이건 너무 아닌데" 싶은 상황이 아니면 되도록 코멘트를 피하는 중이다.
하지만 요즘 돌아가는 꼴을 보면, 그저 지켜만 보기에는 상황이 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다. 다양성을 '배신'이라 부르고, 획일성을 '충성'이라 부르는 조직이 자연계에서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조심스레, 하지만 분명하게 이야기를 꺼내본다. 지금 그 길은 진화가 아니라, 멸종으로 가는 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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