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돌담길은 이별의 장소다
[최보식의언론=윤일원 논설위원]

비움과 버림은 차이가 있다. 비워야 채워지듯 비움은 돌아옴을 뜻하지만, 버림은 이별인 단절을 뜻한다. 비움은 아무리 커도 슬퍼지지 않지만, 버림은 크면 클수록 슬픔이 더해진다. 비움은 덕(德)이고, 덕은 그릇이라 크면 클수록 채워짐도 커진다.
덕수궁 돌담길은 이별의 장소다. 두 손을 마주 잡은 연인이 덕수궁 돌담길을 돌고 나면 영영 단절의 이별을 맞이한다.
이문세가 애잔하게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갔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이라고 ‘광화문 연가’를 불렀지만, 슬프지 않은 이유는 새로운 채움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도 그렇다. 단절인 듯하지만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비움이 너무 커서 단절로 보이는 곳, 서울에 터잡은 지 어언 30년이 훌쩍 넘었지만, 언제나 멀리서 바라봤던 대한문(大漢門) 너머에 있는 곳, 덕수궁이다.
비운의 황제 고종은 명성황후가 경복궁 건청궁에서 살해되는 을미사변(1895)을 겪은 지 6개월 후, 일본의 등쌀이 심해지자, 엄 상궁에게 비밀리 두 대의 가마를 준비하라는 하명을 전달한다. 엄 상궁은 익숙한 듯 영추문(迎秋門, 경복궁 서쪽 문)을 지키는 포졸에게 엽전 꾸러미를 던진다.
포졸들은 "이러다가 궁궐에 남아나는 물건이 하나도 없겠는 걸" 하고 수군거렸지만, 엄 상궁이 빼돌린 왕실의 보물은 다름 아닌 곱게 여자로 분장한 고종과 황태자였다. 이들이 향한 곳은 덕수궁 뒤편 언덕 위에 자리한 러시아공사관이었다.
역사는 이를 '아관파천'이라 부른다. '아(俄)'는 러시아의 옛 이름 아라사(俄羅斯)의 아, '관(館)'은 대사관을 뜻하는 관, '파천(播遷)'은 임금이 위기 시 피난하는 파천을 합하였다.
덕수궁에는 처음부터 중전의 침전이 지어지지 않았다. 중전의 침전은 한 눈에도 알아볼 수 있다. 땅을 상징하며 음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곤(坤, ☷)이기에 지붕에 용마루를 잇지 않는다.
덕수궁은 조선을 마감한 이별의 궁전이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의주로 피난 가서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자 머물 곳이 없었다. 궁궐이 모두 불태워지고 없다. 할 수 없이 월산대군 후손이 머물던 이곳에 거처를 정하고, 석어당(昔御堂)에서 죽는다. 석어당은 덕수궁에서 딱 봐도 아는 2층 목조건물이며 나중에 인목대비도 이곳에 유폐된다. 덕수궁은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을 의미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중명전)이다.
"서른 개의 바큇살이 한 개의 바퀴가 되려면, 그 가운데가 비어야 수레로 쓰임이 된다(三十輻共一轂, 當其無有車之用·삼십폭공일곡, 당기무유차지용)." (‘노자’ 제11장)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는 비움과 채움의 과정이다. 덕수궁에는 퇴근한 수많은 시민과 관광 온 외국인들이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 여념이 없다.
인간의 시공간 해석에는 두 가지 타입이 있다. 하나는 M(mono-chronic) 타입으로 단색이며 분절이며 직선이다. 다른 하나는 P(poly-chronic) 타입으로 다색이며 연속이며 원이다. M 타입의 지배적 가치는 시간이며 신속함이지만, P 타입의 지배적 가치는 공간이며 관계다.
P 타입인 우리는 M 타입의 열강에서 '공간'을 빼앗겨 수모를 당했고, 이제는 M 타입 열강에서 시간을 빼앗기 위해 오늘도 '빨리빨리'를 외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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