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 개선은 정 남북이 모두 공통으로 원하고 바라는 우리 역사나 문화 분야부터

[최보식의언론=박선영 (사)물망초 이사장]

10월 26일,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다. 안중근 의사 거사 115주년이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일이다.

두 사건 모두 우리 역사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날이자, 개인적으로도 내게는 큰 의미가 있는 날이다.

지금은 '정수장학금'이라고 불리지만, 예전엔 '5.16 장학금'이라 불리던 박정희 대통령의 장학금 덕분에 나는 대학을 큰 걱정 없이 다녔다.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와는 내가 의원 생활을 하는 4년 내내 거사일이 있는 10월과 순국일이 있는 3월에 서울, 동경, 하얼빈, 여순 등지에서 안중근의 사상을 널리 알리고, 그의 유해를 찾는 노력을 해마다 진행했던 인연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13년 전인 2011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KGB 문건인 ‘국경 수비대 사건보고서’를 살펴보다가 안중근 의사의 거사 직후 사진과 기록물을 발견했다. 그때의 그 놀라움과 경이로움이란....

러시아의 국경지대 8구역 스트라조프 치안 판사가 기록한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에 대한 수사결과'는 10월 13일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필자의 눈에 안 띠었던, 필자가 새로 발견한 문서이자 안중근 의사에 대한 원자료(raw data)였다.

그 당시 러시아는 정교회 달력을 사용하고 있어서 날짜에서 13일 차이가 났던 것이다. 그래서 1909년 10월 26일이 러시아력으로는 10월 13일이니, 내가 뒤진 10월 26일 이후 기록엔 없었던 것이다.

스트라조프 치안 판사가 기록한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에 대한 수사결과'는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직후에 촬영된 안중근 의사의 전신 사진과 함께 ‘국경수비대 밀레르 검사가 이루쿠츠크 법원의 회니만 데르 검사에게 보내는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에 대한 보고서 형식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동기, 거사에 가담한 동료들에 대한 진술, 목격자들의 진술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지만 중간 중간에 일부 페이지가 누락돼 있었다.

관리인은 '누락의 이유와 누락 시기는 알 수 없다'고 설명하면서도 필자가 후레시를 터트리며 사진을 찍는 것은 허용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에 모든 언론이 대서특필하며 안중근 의사가 수갑과 포승줄에 묶이지 않은 거사직후의 생생한 사진을 모두 1면에 실었다.

방송은 저녁 9시와 8시 뉴스 시간에 모두 기사화했고. 그 후 나는 같은 해 12월에 이루크츠크에 있는 러시아국립역사고문서 보관소에 찾아가 문서 전체를 복사해 사비로 번역, 발표했다. 

그 안에는 민영환과 이범진 등 우리나라 최초의 외교관들에 대한 활동상을 담은 각종 문서들도 있었으나, 내가 국회를 떠난 뒤 안중근 의사 관련 서류나 유해 발굴에는 전혀 진척이 없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공식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나는 개성 아래 청계리에 있던 안중근 생가 복원과 안중근 공동연구 등을 북한에 제안하고 실행하려 기획했으나, 천안함 사건이 터지면서 모든 것은 허사가 되었다.

남북관계 개선은 정치나 경제 분야가 아니라, 남북이 모두 공통으로 원하고 바라는 우리 역사나 문화 분야부터 시작해야 한다.

안중근의 셋째동생 안공근은 1940년 중국에서 실종됐지만, 그의 후손들은 현재도 북한에서 살고 있으니, 그 고리를 활용하면 여러 가지 방안이 도출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정권이 정상회담에만 목을 메고 있었으니 기형적인 회담, 회복하기도 실행하기도 불가능한 부작용만 낳는 것이다.

안중근은 지금도 우리 가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건만, 우리는 안중근마저도 피상적으로 내팽개치거나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있으니 업보만 늘어가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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