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을 찍어서 겨우 고시를 패스하신 분도,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 말을 백 번도 더 들었을 것
[최보식의언론=검비봉 논설위원]

낭만의 시절, "배는 고프지만 우리가 낭만이 없냐" 하던 시절에는, 염색한 군복에 중고 워커를 직직 끌고 다니면서도, 수놈의 행세를 하느라고 눈에 찍어둔 처자에게 부단히 집중한다.
주머니에 담배값도 없는 주제에, 밤새워 연서(戀書)를 써서, 그녀의 창문틈에 꽂아넣는 더벅머리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연애편지 대필만 전문으로 해주던 친구도 있고, 필체가 좋은 친구는 필사를 해주고 담배를 얻어 피우곤 했다. 없는 자가 연애를 한다는 일은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행여 얼굴이라도 한 번 마주할 기회를 잡는 날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이 기쁘지만, 당장 전당포에 타이멕스 시계라도 잡혀야 다방 커피값과 돈가스 값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 시절에 사내들 사이에 일반화된 금언이 있으니, 바로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였다. 친구나 후배가 깡소주에 취해 애정상담을 해올 때, 장시간의 넋두리 끝에 맺어지는 결론은 예외없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어, 잘 해봐"라는 말이었다. 이 말을 금과옥조로 뼈에 새긴 사내들의 집중적인 공략에 넘어가고 만 처자들도 하나 둘이 아니다.
시인 김관식(1934-1970)은 서정주의 처제에게 반해 집중 공략하였으며, 음독을 불사한다고 맹렬하게 찍어댄 결과, 결국은 천사 같은 여인 방옥래를 찍어 넘어뜨렸다. 그 시절 먹고살기도 어려운데 왜 사랑이라는 감정의 사치(유희, 착시라고도 한다)에 그토록 매달렸을까?
눈에 띄는 유무형의 목표가 안 보이고 삶이 고되고 지루하던 중에, 어느 날 주변으로부터 풍겨오는 꽃향기를 맡는 순간에, 그만 중독되고 말아서 그랬는가?
그 당시, 꺽꺽 토해가면서 술을 먹던 사내들의 실연담을 분석했을 때 가장 큰 실패요인으로 검토되는 항목이 "열 번을 찍기나 했느냐"였다.
그것 봐, 남들은 열 번 찍어서 다 성공하는데, 자네는 먼 발치에서 지형 정찰만 하느라고 세월 다 보내고 그새 날랜 놈이 매처럼 채갔잖아.
"도끼는 어깨에 둘러메고 다니라고 있는 게 아니야, 나무를 찍어야지, 나무를."
남은 속이 상해 죽을 맛인데, 놀려대는 소리는 가혹하다.
남자들의 뇌리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이라는 명제는, 꼭 연애 방면에만 한정치 않고, 차차 시험이나, 취업, 데뷔 등에도 응용되었다. 아홉 번을 찍어서 겨우 고시를 패스하신 분도,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이라는 말을 백 번도 더 들었을 것이다.
요즘은 다르다. 낭만도 달라졌고, 처자들도 옛날 처자들이 아니다. 시인의 아내처럼 불쌍해서 넘어가 주는 처자는 팔도를 다 뒤져도 전무한 세상이다.
열 번을 다 찍었다가는 큰 낭패를 치른다. 진정으로 마음을 끄는 여인을 만나면 크게 두 번, 또는 세 번 만 찍어라, 그 이상 찍으려고 했다가는 순찰차 신세를 질 수도 있다.
“멀쩡한 정신을 가진 사내에게 '스토커'라는 명칭이 웬말이냐? 억울하다”고 할 때는 이미 늦다. 눈 높은 처자를 향해 도끼를 드느니 그 시간에 열심히 노력해서 스펙을 쌓도록 하라. 머리가 모자라면, 열심히 운동을 해서 '식스팩'이라도 만들어야 한다(식스팩에 환장하는 처자도 많다.)
요즘 처자들은 뒤에도 눈이 있다. 어두운 밤거리에 그녀의 뒤를 따라 갔다가는 큰 코 다친다.
호랭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어느 청년이 길에서 이상형의 여대생을 만났다.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서 갔단다. 찰랑이는 머리칼과 하얀 종아리만 보면서 따라간 그녀의 집 앞에서, 대개는 일단 그냥 돌아서서 오는 게 상례인데, 어떤 영문인지 그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녀의 부친과 마주 앉게 되었다고 한다.
양반가 사내들답게, "어디서 무엇하시는 뉘댁 자제시오?" 이런 식으로 점잖은 이야기가 시작되더니, "부인, 여기 술상 좀 내오시오. 양주로 가져 와" 이런 경우는 상스러운 도끼 따위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 시간에도, 가슴 가득히 그녀에 대한 사랑을 품고 애를 태우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연정으로 연애하는 시대는 지난 듯하다. 게임기 앞에서 열심히 집중하다가 game over 가 뜨면 쿨하게 바로 일어나야 하는 야박한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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