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새 늙어서 무기력해진 남자는 어딘가로 나가 볼 염도 못내고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창밖을 내다보다가

날씨가 꾸물꾸물 눈이 올 듯한 하늘인데, 일기예보에서는 겨울비가 내릴 거라고 한다. 이불솜 같은 하얀 눈이 탐스럽게 내리면, 사람들의 기분은 들뜨고, 개들도 눈밭 위를 달리면서 신바람이 난다. 나는 첫눈이 오는 날이면, 반가우면서도 낑낑대는 강아지와 같은 심정이 된다.
젊은 어느 날, 그녀와 헤어지면서 손가락 걸고 약속한 게 있다. 지금은 헤어지지만 매년 첫눈이 오는 날에는 꼭 만나자. 철썩같이 약속하고 고개도 끄덕이고, 힘주어 서로의 손을 꼬옥 잡으므로 해서 약속을 다졌다. 바쁘게 사느라고 그랬는지 한때의 추억으로 치부했는지 첫눈 오는 날의 약속은 이행되지 않은 채 세월이 흘렀다. 한참이 지나 인생을 관조하고 차분해지는 나이에 갑자기 그녀와 약속했던 일이 대두된다. 나가서 한 번 만나보자. 무척 반가울 거야.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첫눈 오는 날 그녀를 만나려 해도 쉽지가 않다, 설명을 쉽고 간단하게 하고 싶다,
내가 A, B, C, D, E 다수의 여인과 각각 첫눈 오는 날의 약속을 한 것은 아니다. A에게는 서울역 경부선대합실에서 만나자, B에게는 남산 식물원 온실에서 만나자, C에게는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만나자, D에게는 피카디리 앞에서 만나자 등등 으로 첫눈의 약속이 되어있는 게 아니다. 그랬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위 네 군데의 장소 중에 아무데나 나가면, A, B, C, D 중에서 누구라도 만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속을 한 사람은 한 명인데,(혹여 건성으로 약속한 사람이 또 한 명 있을 수도) 장소가 헷갈리는 것이다. 머리를 짜내고 집중을 해봐도, 위 네 군데 이상의 장소 중에 어디가 맞는지 도통 기억이 안 난다. 그래서 첫눈 오는 날이면 안절부절하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펑펑 쏟아지는 눈발 속을 헤치고, 그녀가 세파에 시달린 몸을 이끌고 눈 위를 뽀득뽀득 소리를 내면서 걸어오는 모습이 연상된다. 나름대로 공들여 화장을 해서 최대한 나이를 가리고 힘들게 걸어와서 대한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울역 경부선 대합실 안의 어느 벤치에 앉아서 오가는 인파 속에서 열심히 내 모습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첫눈 오는 날, 어느 새 늙어서 무기력해진 남자는 어딘가로 나가 볼 염도 못내고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창밖을 내다보다가, 문밖에 나가 내리는 눈을 맞아보다가, 툴툴 털며 집안으로 다시 들어서고 만다.
행여 그녀가 그 어느 곳엔가 나왔다면, 부디 춥지 않게 털모자와 목도리를 잘 두르고 나왔기를 빌 뿐이다. 춥게 입고 나왔다가 감기라도 들면 이 겨울내내 남자를 얼마나 원망하겠는가. 그녀는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 분이 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닌데 이미 고인이 되어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운수는 하늘에 맡기고 올 겨울에는 그 장소들 중에 한 곳에 나가봐야겠다. 시간은 12시 정오, 시간만은 누가 무어라 해도 정확하다. 시간을 정확히 하자고 둘이서 이 노래를 흥얼거렸기 때문이다.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같은 대한민국 만세,
ps. 우리처럼 먼후일의 재회를 약속하는 젊은이들이 요즘도 있을런가 모르지만, 반드시 공증사무실을 이용해서 약속을 확실하게 해두기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