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은 사람과 관련된 사건을 맡을 때마다 꽃을 사들고 그의 영혼을 만나러 갔다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인공지능이 생성한 삽화
인공지능이 생성한 삽화

나는 죽은 사람과 관련된 사건을 맡을 때마다 꽃을 사들고 그의 영혼을 만나러 갔다. 서귀포 길가 꽃집에는 외로워 보이는 노란 제라늄 화분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화분을 렌트카 뒷자리에 싣고 성산의 남국선원으로 향했다. 열어 놓은 차창으로 맑고 투명한 겨울 숲의 향기가 들어오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비탈 여기저기 억새들이 바람에 물결치고 있었다.

나는 허상철 옹의 묘지를 찾아가고 있다. 죽은 의뢰인을 만나러. 죽은 자의 영혼은 떠나지 않는다. 얼마간은 이곳에 남아 떠돌 것이다.

죽은 사람의 영혼에 철저히 거부당한 적도 있었다. 살인범의 변호를 맡고 그가 죽인 영감의 집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폐허가 된 그 집에는 음산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살해된 영감이 핏발 선 눈으로 나를 째려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런 느낌을 알까? 미신이라고 치부해 버릴지도 모른다.

공동묘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현무암으로 나즈막하게 바람막이 벽을 한 안에 봉분이 보였다. 그런 형태들이 산자락에 버섯같이 솟아 있었다. 올레 주차장에서 차를 세우고 화분을 들고 비탈길을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넓은 공동묘지는 진공 속 같았다. 멀리 군청색의 드넓은 바다가 내려다 보였다.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겨울나무 가지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이 비명을 질렀다.

허상철 옹의 묘지가 멀리 바라다보이는 곳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주변 환경이 변하는 느낌이었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 소리도, 내 발소리까지 모두 허공 속에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나는 전혀 다른 세계에 혼자 서 있는 느낌이었다. 그때 뭔가가 가슴팍을 쿡 찔렀다. 아니, 뚫고 들어왔다. 

나는 '헉-' 하고 신음을 내며 가슴에 손을 댔다. 허리가 수그러졌다. 내 안에 뭔가가 들어간 것 같았다. 분명 어떤 존재가. 순간 직감했다. 허상철 옹이다. 그의 영혼이 내게 들어왔다. 두려웠다. 그냥 돌아갈까. 그의 아바타가 되어가면서까지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왜 하필 나인가. 갑자기 가슴이 끓는 납을 부은 듯 무겁고 답답해졌다. 숨을 크게 들이 쉬었지만 공기가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왕 마음먹고 나선 길이었다. 나는 가슴에 손바닥을 댄 채 다시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심장이 강하게 뛰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리적 감각을 느낄 정도의 체험은 처음이었다. 

아니 한 번 더 있었다. 재벌회장의 장례식. 영정사진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기도할 때였다. ‘살아서 왜 그렇게 인색하게 살았습니까?’라고 그에게 마음으로 물었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퍽'하고 뒷통수를 때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떴다. 주위의 색깔이 필터를 씌운 듯 노랗게 변해 있었다. 죽은 영혼이 그곳에 있다가 나를 때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허상철 옹의 묘가 나왔다. 가지고 온 제라늄 화분을 앞에 놓았다. 바닥에 쌓인 눈이 굳어 살얼음이 되어 있었다. 봉분 위의 마른 풀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그 앞에 검은 비석이 보였다. 비석에 새겨 놓은 글은 이랬다.

'두고 온 고향 그리워, 늘 외로움에, 눈물지으시던 아버지, 이제는 솟는 해 뜨는 달이 영원히 함께 할 것입니다. 피는 잎 부는 바람 즐기시며 편히 쉬세요 아버지. 우리들 사는 소리로 비단 이불을 지어 포근히 덮어 드리겠습니다. 아버지! 당신이 한없이 그립습니다.'

과연 진짜 자식들의 마음일까. 그 옆에 이런 내용을 새긴 신도비가 서 있었다.

'빈 땅에서 한 올 한 올 핏줄을 말려 베를 짜는 고된 세월을 사시면서 억만금을 만드셨도다. 팔순을 사시고 먼 길을 떠나실 적에 가난과 질병으로 죄 없이 시드는 생명들을 구하시고자 억만금을 다 쓰시니 곧 대인의 길이었도다. 대인의 드높으신 뜻 만대에 길이 빛나리라'

비석의 글귀를 읽으면서 나는 딸인 허 교수가 하던 말을 떠올렸다. 아름다운 문구들 뒤에 숨겨진 진실.

"아버지가 제주도에 가신 것도 사실은 마지막에 아들이 무서워 도망을 간 거예요. 아버지는 재단에 절대로 오빠가 관여하지 말게 하라고 그랬어요."

"오빠는 어떤 사람입니까?"

"어려서부터 엄마가 아버지 돈을 빼돌려 부잣집 아들로 키웠어요. 카지노를 드나들었죠. 못난 친구들 몰고 다니면서 돈을 뿌려댔죠. 아버지가 빌딩을 주고 사우나를 차려줬는데도 다 말아먹었어요."

"그러면 아버지의 기부가 오빠와 관련이 있습니까?"

갑작스럽게 모든 돈을 내던진 기부였다.

"솔직히 아버지의 기부 동기는 어떻게 해서라도 아들한테는 주지 않겠다는 오기의 발동이에요. 기자회견을 할 때 아버지가 오빠 욕을 하려는 걸 방송국 국장이 미리 알고 하지 못하게 막았어요."

허 교수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버지가 저한테도 평생 번 돈을 태워버리거나 아니면 바다에 집어 처넣고 싶다고 했어요. 아버지의 솔직한 심정이었죠. 그러다 방송 프로그램을 보고 전액을 그냥 기부해 버리신 거죠."

인생 말년에 자식이 원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저는 아버지와 오빠의 싸움을 숨기고 아름다운 기부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요. 그게 진짜 배경입니다."

그녀의 표정이 서글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오빠가 돈을 주지 않는다고 막 덤벼들었죠. 성질이 불같던 아버지는 방석 밑에 총을 숨겨두고 계셨다니까요."

나는 다시 비석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당신이 한없이 그립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아니, 어쩌면 거짓말도 진실도 아닌, 복잡하게 얽힌 인간의 감정이었다.

허상철 옹의 기부는 무엇이었을까. 사랑이었을까, 분노였을까. 아니, 어쩌면 둘 다였을지 모른다. 평생 모은 돈을 없애버리고 싶다던 그 절망. 그 절망이 기부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돈은 TBS라는 거대한 조직에 삼켜졌다. 허상철 옹의 인생은 무엇이었을까. 돈을 모으는 기계였을까, 자식에게 배신당한 늙은 아버지였을까, 아니면...

나는 묘 앞에서 눈을 감았다.

'이번에 당신의 소송을 맡게 된 변호사입니다. 단순하게 돈벌이를 하기 위해 일하지는 않습니다. 의미를 찾기 위해 이 자리에 왔습니다. 당신의 뜻은 무엇입니까?'

' ------- '

갈대숲에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만 공허하게 들려왔다. 속이 계속 답답했다. 잔잔한 분노가 일어나는 느낌이었다. 허상철 옹의 대답은 이 분노인가. 나는 다시 마음으로 물었다.

'왜 돈을 신으로 모시다가 그 신을 하루아침에 버렸습니까?'

나는 영혼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

어떤 반응도 없었다. 바이스로 조이듯 가슴팍이 답답했다.

'제가 맡은 이 일을 어떻게 해 드리면 좋겠습니까?'

내가 마음으로 다시 물었다.

'-------'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저는 이렇게 계획합니다. 사건을 법정에 올려놓겠습니다. 이 사건을 우리 사회의 기부 문화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로 만들겠습니다. 법정을 통해 그리고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을 글을 통해 세상에 알리겠습니다. 그러나 미움을 가지고는 아닙니다. 사랑을 가지고 그 모든 것들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능선 저쪽에서 안개가 산자락을 따라 소리 없이 흘러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다시 적막한 산길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가슴의 답답함은 여전했다. 아니,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갑자기 뒤에서 허상철옹이 한 마디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서 저녁 까마귀 한 마리가 겨울 하늘을 향해 "아악"하고 소리치고 있었다. 내가 순간적으로 까마귀를 보며 똑같이 따라해 보았다.

"아악 아악"

까마귀가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비탈길을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봤던 까마귀가 내가 가는 길 옆 나뭇가지로 이리저리 옮기면서 따라오고 있었다.

잠시 후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다른 까마귀들이 내 주위의 나뭇가지 위로 까맣게 몰려들었다. 하나, 둘, 셋... 나는 세어 보았다. 수십 마리였다. 그중 몇 놈이 내 바로 앞 낮은 가지에 내려앉았다. 검고 날카로운 눈. 까마귀들은 뭔가를 보고 있었다. 나와 함께 내려오는 허상철 옹의 영혼을 본 것은 아닐까.

까마귀들은 내가 차를 세워둔 주차장까지 따라왔다. 나는 차에 탄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까마귀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북쪽 하늘을 향해. 서울이 있는 방향.

나는 시동을 걸었다. 속에 그가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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