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 노인이 없거든 빌려서라도 모셔라

[최보식의언론=박정원 객원논설위원(더시그넘하우스 연구소장)]

인공지능이 생성한 삽화
인공지능이 생성한 삽화

‘나이가 든다고 해서 반드시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현명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연륜)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현명하다는 의미는 단순히 지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가졌음을 나타낸다. 그 지혜는 경험의 축적과 그 축적된 경험을 통해 얻어진 통찰력이라는 그 두 가지 핵심 가치를 포함한다. 

노인은 혼잣말이 많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랜 경험을 통해 얻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지혜이다. 노인의 지혜는 삶의 지혜이고, 숱한 실패를 통해 얻은 오답 노트에 가깝다. 

노인의 지혜에 관한 격언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두루, 그리고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한국과 중국 속담에 ‘집안에 노인이 없거든 빌려서라도 모셔라’는 말이 있다. 노인들의 경험이 농경 사회나 대가족 제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복잡한 갈등과 자연재해, 즉 공동체의 위기관리와 화합에 필수적인 기능과 역할을 강조한 내용이다. 

‘노마지지(老馬之智)’란 말도 있다. 늙은 말의 지혜란 뜻이다. 아무리 하찮은 동물이라도 오래 살면 나름의 장점과 지혜가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내포한다. 중국 제나라 때 관중이 길을 잃고 헤매다, 늙은 말이 가는 길을 따라갔더니 집을 찾을 수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이는 반복된 경험이 직관적인 문제 해결 능력으로 발휘될 수 있는 사실을 나타낸다. 

동양뿐 아니라 서양에도 있다. ‘노인 한 명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기록문화가 발달하기 전 노인은 지식의 유일한 저장소이자 전달자였으며, 이는 현대에도 암묵지(Tacit Knowledge)의 중요성으로 해석된다. 

암묵지는 말이나 글, 공식, 매뉴얼 등으로 완전히 설명‧전달하기 어렵지만 개인의 경험과 직관, 몸에 밴 숙련으로 체화된 지식을 뜻한다. 이와 반대의 개념으로 형식지(Explicit Knowledge)로서, 매뉴얼, 논문, 규정처럼 언어‧숫자로 명확히 표현되고 쉽게 전파되는 지식을 말한다. 

또 ‘청년은 빨리 달리지만 노인은 길을 안다’는 격언도 있다. 이는 속도보다 방향, 열정보다 전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미로서, 물리학적 에너지로는 청년이 우세할지라도, 효율적인 경로를 선택하는 의사 결정 최적화 능력은 노인이 우위에 있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말이다. 

격언을 통해서 본 동양의 핵심 가치는 순응과 조화, 그리고 도리 등을 강조하며, 서양적 가치로는 통찰과 효율, 그리고 전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동양은 인격적 수양의 결과를 나타내며, 서양은 생존 경험의 총합을 의미한다. 따라서 지혜로운 노인은 무엇을 해야 할지보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는 데 더 능숙하다고 할 수 있다. 오랜 시간 축적된 오답 노트가 머릿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해오는 격언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과학적 근거가 있다. 그냥 전해져 오는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심리학자 카텔(Cattel)과 혼(Horn)의 ‘결정성 지능(Crystallized Intelligence) 축적 이론’이 있다. 이는 경험과 학습을 통해 얻은 지식‧기술이 생애 전반에 걸쳐 서서히 쌓이고, 특히 중장년 이후까지도 증가한다는 발달‧축적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관점이다. 

지능은 크게 유동성 지능과 결정성 지능으로 나뉜다. 유동성 지능은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고, 정보를 빠르게 처리하는 능력으로 20대 이후엔 점차 하락한다. 반면 결정성 지능은 오랜 경험과 교육, 학습을 통해 쌓인 지식과 노하우를 말한다. 이는 60~70대까지도 계속 발달하거나 유지된다.

따라서 나이가 들면 정보 처리 속도는 느려지지만 패턴 인식, 즉 과거의 경험을 현재 상황에 대입하는 능력은 정교해져 복잡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의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감정 조절 능력과 사회적 인지 이론으로 설명한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노년층은 청년층에 비해 ‘긍정 편향(Positive Effect)’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부정적인 감정에 매몰되기보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평온을 유지하는 정서적 성숙 능력이 향상된다. 또한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고 이해관계가 얽힌 갈등에서 타협점을 찾아내는 사회적 지혜는 중장년층에서 가장 높게 나타난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독일 맥스 플랑크연구소의 폴 발테스(Paul Baltes)와 우르술라 슈타우딩거(Ursula Staudinger)가 개발한 ‘베를린 지혜 모델(Berlin Wisdom Paradigm)’도 있다. 이들은 지혜를 ‘삶의 기본 실천(Pragmatics of Life)에 대한 전문 지식’으로 정의하며, 단순히 오래 산 것이 아닌 5가지 요건을 갖춘 상태를 전제로 한다. 베를린 모델은 지혜를 학문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성과로 평가받는다. 

❶ 사실적 지식(Rich Factual Knowledge)은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갖춘 상태를 말한다. 인간 본성과 발달 변화, 사회 규범 등 삶의 기본 사실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가진 지식이다. 

❷ 절차적 지식(Rich Procedural Knowledge)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다. 이는 삶의 관리‧계획‧회고를 위한 실천적 전략을 갖춘 지식이다. 

❸ 생애 맥락주의(Lifespan contextualism)는 삶의 사건들이 시대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일어남을 이해하는 것이다. 삶의 맥락과 시간적 발달적 변화를 인식하는 능력이다. 

❹ 가치 상대주의(Relativism)는 개인마다 가치관이 다름을 인정하는 포용력이다. 가치‧목표‧우선 순위의 개인과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며, 올바른 답이 없음을 인정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이다. 

❺ 불확실성(Management of Uncertainty) 수용은 삶의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이에 대처하는 능력을 말한다. 완벽주의를 피하고, 지식 한계와 삶의 예측 불가능성을 인정하고 대처하는 것이다. 

발테스와 슈타우딩거는 지혜의 개념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면서 체계화를 시도했다고 평가받는다. 이러한 5가지 지식을 갖추고 있으면 만사형통의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모든 노인이 이러한 지혜를 갖추고 있으면 세상은 갈등이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나이 자체가 지혜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경험에 대한 성찰(Reflection)이 동반될 때 지혜를 발휘할 수 있다. 성찰 없는 경험은 고집이나 독선이 되기 쉽고, 성찰이 더해진 경험이라야 비로소 지혜가 된다. 지혜를 가진 노인과 지혜를 가진 사회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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