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이 봄날, 나를 집 안에만 머물게 하는 데에도 또한 까닭이 있으리라
[최보식의언론=이병철 논설위원]

발을 다쳐 집 밖을 나가지 않은 지도 어느새 열여드레째로 접어들었다. 치료를 위해 차를 타고 나가는 것 외에는 온 종일 집 안에만 머무는 날들이다.
집 안에서 이리 꼼짝 않고 있었던 적은, 아마 걸음을 배운 뒤로는 처음인 듯하다.
엊그제 발의 통증이 한결 나아진 것 같아 걷는 연습이라도 해볼까 하여 집 주변을 잠시 걸었더니, 발이 다시 붓기 시작했다. 당분간은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붓기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집 안에 가만히 있는 일이 그리 힘든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잦은 바깥나들이에 몸이 길들여진 탓일까. 집 주변의 가벼운 산책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렇게 발목 부상으로 눈부신 이 봄날, 나를 집 안에만 머물게 하는 데에도 또한 까닭이 있으리라 싶다.
'隱居何復求 無言道心長'
거실 창 벽에 걸려 있는 나무판에 새겨진 글이다. 무위당(无爲堂, 장일순) 선생의 글씨를 우졸당(又拙堂) 형님이 서각으로 만들어 보내준 것이다. 현판이 거실 창문 위에 걸려 있으니 하루에도 십여 차례는 절로 마주하게 된다. 아마 이 현판이 걸린 지도 십 년은 훨씬 넘었을 터이니, 이 글을 읽은 횟수만 해도 수천, 수만 번은 되었으리라.
(현판에는 '如流堂 請覽'이라는 글 아래 '壬午冬'이라고 되어 있으니, 2002년 겨울에 새겨 보내준 것이다.)
옛 선비들은 같은 글을 백 번만 되풀이 읽어도 절로 그 뜻이 깨우쳐진다고 했는데, 이 글을 그토록 수없이 읽고도 이제야 새삼 그 뜻을 다시 새겨보고 있다.
이 글의 의미를 대개 '은거해 사는데 다시 무엇을 더 구하겠는가. 말없이 지내는 가운데 도의 마음이 길게 자란다'고 풀이하지만, 나에게는 '無言道心長'이 '말없이 지내며 다만 도의 마음을 기를 뿐'이라는 뜻으로 다가온다. 한문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으니 내 해석이 온전하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스승 무위당의 글씨가 선배 우졸당의 서각을 통해 내 거실 창문 위에 걸리게 된 까닭이 무엇인지 새삼 생각해 본다.
생전에 스승으로부터 십여 점의 글씨를 받았다. 그 가운데는 아직 그 의미를 제대로 새기지 못한 것도 있고, 볼 때마다 그 뜻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도 있다. 스승께서 이 글을 쓰실 때의 마음과 그렇게 쓴 글을 나무에 새겨보낸 그 선배의 마음을 새삼 생각한다. 여태까지 깊게 살펴보지 못했던 그 마음이 가까이 느껴지는 것 같다.
생전의 스승께서는 담소를 좋아하셔서 찾아오는 이들과 허물없이 마주하며 말씀을 즐겨 나누셨지만, 때로는 그 사람에게 알맞은 글을 써 주어 곁에 두고 그 뜻을 새기도록 하시기도 했다. 내가 받은 글씨들 또한 모두 그러한 뜻이 담긴 것이라 여겨진다.
'隱居何復求 無言道心長'
발목 부상으로 꼼짝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제라도 바깥세상에 대한 부질없는 걱정은 내려놓고 '말없이 도나 제대로 닦아라' 하시는, 현판 속 스승의 일깨움이 아닐까 싶다.
이 글은 남송의 유학자 주희가 무이산에 은거하며 지은 시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한다.
'晨窓林影開
夜寢山泉響
隱居復何求
無言道心長
새벽 창에 숲 그림자 열리고
밤중 베갯머리엔 산속 샘물 소리 울리네
은거함에 다시 무엇을 구하리오
말없는 가운데 도심이 자라겠지'
정원 님(필자의 부인)이 산책길에서 개나리 꽃가지를 꺾어왔다. 내가 산책을 하지 못해 올봄의 그 노란 개나리꽃을 보지 못했으니 보여주기 위해 모셔온 것이다.
오늘 거실에서 그 개나리꽃이 활짝 피었다. 길가에서 보던 개나리꽃보다 훨씬 더 샛노랗다.
샛노란 개나리꽃을 보니 순백으로 피어나는 그 무구한 목련꽃 앞에 마주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절실해진다.
아, 목련, 나는 아직 도심을 제대로 기르지 못한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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