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진행된 대미 투자는 매몰비용이 되나
[최보식의언론=이병태 카이스트 명예교수]

미국 연방대법원은 20일 트럼프 대통령이 비상경제권법(IEEPA)을 근거로 부과한 관세 대부분이 불법이라고 판결했다.
예상되었고 공언한 바와 같이 트럼프는 사법부의 판결에 굴복하는 대신, 다른 법적 근거를 찾아 즉각적인 보복 조치에 나섰다.
판결 당일인 20일, 10%의 보편 관세를 새로 도입하겠다고 발표한 데 이어, 하루 만에 이를 해당 법안(섹션 122)이 허용하는 최고 세율 15%로 상향 조정했다. 이 법적 근거는 최대 150일 동안만 일시적으로 유효하며, 향후 '국제 수지 적자' 입증 여부를 두고 또 다른 법적 공방이 예상된다.
IEEPA를 통한 포괄적 관세가 막히자, 보다 구체적이고 법적 근거가 확실한 개별 조항들인 섹션 232(국가 안보) 및 섹션 301(불공정 무역) 조항을 통해 관세 벽을 다시 쌓겠다는 태도다. 이 방식은 공식적인 조사가 선행되어야 하므로, 트럼프 특유의 즉흥적이고 빠른 협상 스타일에는 제약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외견상 대법원의 관세 제동 판결로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이 됐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사안은 복잡하다.
2026년의 경제적 안정을 기대했던 시장의 희망은 사라졌다. 경제에서 제일 나쁜 것이 '불확실성'이다. 관세 체계의 급변으로 고용과 투자 계획 수립이 더욱 어려워졌다.
지금도 미국은 성장이 나쁘지 않은데도 노동시장이 약화되는 이유 중 하나가 트럼프발 불확실성으로 인해 기업들이 투자와 고용을 미루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트럼프 '15% 보편 관세(Section 122)' 전격 발동은 대법원의 위헌 판결을 무력화하려는 고강도 승부수다. 특히 '150일'이라는 시한부 조건은 지금까지 어느 정도 정리되어가던 관세가 다시 모호해졌다는 것이다. 기업들에게 새로운 불확실성을 안겨주고 있다.
150일(약 5개월) 이후 관세가 연장될지, 혹은 다른 법안으로 대체될지 불투명하기 때문에 기업들은 이 기간 선택이 어렵다. 이 기간이 끝나는 시점이 미국의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다는 점도 판단을 어렵게 한다.
장기 공급 계약(Long-term Contract)의 위험성이 커짐에 따라, 기업들은 스팟(Spot) 계약 비중을 확대할 것이다. 1년 단위 계약보다는 3~6개월 단위의 단기 계약이 주를 이룰 것으로 보인다.
관세 전가 조항(Tariff Clause) 삽입이 필요하다. 관세 변동분(15% 등)을 구매자가 부담하거나, 관세 소멸 시 가격을 즉각 재조정하는 유연한 가격 책정(Dynamic Pricing) 모델 도입이 시도될 것이다.
미국 내 공장을 보유한 현대차, 삼성전자, LG전자 등은 국내 생산분과 현지 생산분의 비중을 150일 단위로 극명하게 조절해야 한다.
재고 관리의 'JIT(Just-in-Time)' 붕괴와 'JIC(Just-in-Case)' 확산으로 바뀌어야 한다.
전통적인 효율 중심의 재고 관리 방식이 완전히 무너지고 있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운전 자본(Working Capital)의 계획도 어렵게 된다. 재고가 늘어나면 기업의 현금 흐름이 묶이게 되며, 이는 금융 비용 상승으로 이어져 기업의 재무 건전성에 압박을 줄 수 있다.
한국은 '기존 합의 15%'와 '트럼프의 새로운 발표 15%'로 동일해 보이기 때문에 "변한 게 없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내용물'과 '리스크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졌다.
기업들이 더 당혹스러워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구조적 차이다.
한미 양국이 협상을 통해 도출한 15%는 일종의 '무역 협정' 성격이었다. 즉, 한국이 대규모 투자를 약속하는 대가로 미국이 관세를 낮춰주기로 약속한 '계약'이었다.
하지만 지금 트럼프 대통령이 발동한 15%는 한국과의 '합의'를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대법원 판결에 반발하여 '섹션 122'라는 별도의 법적 권한으로 전 세계에 일괄 부과하는 것이다. 한국의 투자 약속과는 상관없이 언제든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세율이 바뀌거나 추가 조건이 붙을 수 있는 '일방적 통보'다.
가장 큰 변수는 150일이라는 '시한폭탄'인 안정성 여부다. 이미 협의된 관세는 투자 이행 기간 동안 유지될 것이라는 예측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 섹션 122는 법적으로 최대 150일만 유효하다. 150일이 지나면 의회의 승인을 받거나, 다른 법적 근거(섹션 301 등)로 갈아타야 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5개월마다 새로운 '관세 절벽 또는 충격'이 찾아오는 셈이며, 이는 장기적인 투자나 공급 계약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중첩 부과'의 위험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문을 자세히 보면 "기존 관세에 더해(over and above)" 15%를 부과하겠다고 언급하고 있다.
만약 한국산 특정 제품(예: 철강)에 이미 섹션 232에 따른 관세가 매겨져 있다면, 이번에 발표한 15%가 그 위에 추가로 얹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즉, 실효 관세율이 15%를 훨씬 상회할 수 있다.
한국 기업들은 15% 관세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대규모 대미 투자를 결정했다. 이제 미국 정부가 "대법원 때문에 기존 합의는 무효이지만 내가 새로 만든 법으로 15%를 내라"고 한다면, 한국 기업들은 이미 약속한 투자는 '매몰 비용'으로 진행하면서도 법적 보호는 받지 못하는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결론적으로 한국 정부가 미국과 협상할 것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1. 기존 개별 품목 관세(특히 자동차, 철강)에 중첩부과가 안 되도록 하는 것
2. 천문학적 대미 투자 약속의 성격과 조정 요구
물론 트럼프가 호락호락하게 나올 리가 없다. 우리는 시장뿐만 아니라 안보를 미국에 의지하기 때문에 트럼프는 협상 카드가 많다. 한국의 협상력을 위해서도 자주 국방의 의지는 더 강하게 천명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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