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라고 허물 많은 걸음이었으나, 그래도 이렇게 살아올 수 있었음을 고맙게 여기는 절을

[최보식의언론=이병철 논설위원]

사진 이병철 시인
사진 이병철 시인

지난번 짧은 가족 여행을 다녀온 뒤, 설을 서울에서 쇠고 내려갈 생각으로 막내 집에 머물고 있다. 막내의 사정이 시골집까지 다녀가기에는 여의치 않아 우리 내외가 서울에 와 있는데, 일종의 역귀성이라 할 수도 있겠다.

설이라고는 하지만 몇 해 전부터 명절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한 터라, 서울에서 설을 쇠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더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파트 생활이 시골집보다 따뜻하고 여러모로 편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내게는 닫혀 있다는 갑갑한 느낌은 지우기가 어렵다.

설 연휴가 시작되었다는데 TV도 보지 않아서인지 명절 분위기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듯한 하루들. 서울의 거리는 오히려 더 한산하고 차분하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설을 쇠러 고향으로 내려갔기 때문일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며 오늘이 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 섣달그믐이라는 사실을 떠올리자 문득 ‘묵은세배’라는 말이 함께 떠올랐다.

고향 집에서 선친께서는 섣달그믐날이면 마을 어른들을 찾아뵙고 문안을 드리시곤 했는데, 그것을 묵은세배를 드리는 것이라 하셨다.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어른들을 찾아뵙고, 그분들 덕택에 한 해를 잘 지냈음에 대한 감사와 함께 여전히 곁에 계셔주어 고맙다는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이리라.

묵은세배는 고려 시대 이전부터 내려온 ‘세말(歲末) 문안’ 풍습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의 기록을 보면, 섣달그믐날 저녁에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대궐에 들어가 임금께 문안을 드리고, 일반 가정에서는 사당에 절을 올린 뒤 집안 어른들을 찾아뵈었다고 한다.

지금처럼 연락 수단이 없던 시절, 한 해 동안 별탈 없이 지냈음을 확인하고 고마운 분들께 직접 찾아가 인사를 드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도리였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묵은세배는 새해의 세배 못지않게 중요한 예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묵은세배는 새해를 맞이하기 전, 아직 해가 바뀌지 않은 섣달그믐날에 드리는 마지막 절이다. 한 해의 첫날인 정월 초하루에 올리는 세배가 새해의 복을 비는 희망의 인사라면, 묵은세배는 한 해를 무사히 마친 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라 할 수 있다.

부모님과 어른들께 감사를 전하고, 연세 드신 어른들의 안부를 살피는 효심의 표현이자,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기 전 마음을 정돈하는 의식이기도 했을 것이다.

내게는 이 묵은세배에 담긴 감사의 의미보다, 지난 한 해의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과 참회의 뜻이 더 깊게 다가온다. 새로운 한 해를 정녕 새롭게 맞이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난 한 해의 부족함과 허물을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남을 탓하기보다 내가 미처 살피지 못한 것은 없었는지를 묻는 절. 송구영신이라는 말처럼, 잘 보내야 잘 맞이할 수 있는 법일 것이다.

오늘 섣달그믐날, 서울의 흐린 하늘 아래에서 묵은세배를 새삼 생각한다. 이 서울 하늘 아래에는 내가 찾아가 묵은세배를 올릴 어른이 더는 계시지 않다는 사실이 마음 한켠을 아릿하게 한다.

어디 서울 뿐이랴. 스승님이 떠나신 지도 어느새 삼십 년이 훌쩍 지났고, 내가 사형이라 부르던 분들도 이제 거의 다 떠나셨다. 내가 따랐던 선배들 또한 세월을 따라 대부분 먼저 길을 떠났다. 찾아가 뵙지는 못하더라도 전화로라도 인사를 드릴 분들이 이제 몇 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아픔처럼 가슴에 와 닿는다.

어른들이 계시지 않는 이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기에는 아직 한참 못 미치는 스스로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런 나 자신을 향해서도 섣달그믐날의 묵은세배를 올린다.

지난 한 해 모자라고 허물 많은 걸음이었으나, 그래도 이렇게 살아올 수 있었음을 고맙게 여기는 절을.

그렇게 살아올 수 있도록 이끌어준 인연들에 대한 감사의 절을.

을사년, 지난 한해 동안 모자라는 나를 품어준 인연들에게, 내 삶을 스쳐간 모든 인연에게, 묵은세배를 올린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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