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명왕성과 국장… 비밀공작의 끝에서 마주한 두 개의 운명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인공지능이 생성한 삽화
인공지능이 생성한 삽화

명왕성을 만난 지 두 달이 지났다. 법정 투쟁이라지만 막연했다. 정보기관은 '부존재'라는 세 글자로 거대한 벽을 만들었다. 법원이 문서제출명령을 내렸지만 그들은 검은미소를 흘리며 비웃는 것 같았다.

4월 29일 저녁이었다. 아내가 손녀를 돌보느라 바쁘니 저녁을 먹고 들어오라고 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깔끔한 돈가스집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식사를 하는 도중이었다. 옆자리에서 혼자 늦은 저녁을 먹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안면이 있었다.

순간 심장이 뛰었다. 내가 정보기관에 근무할 때, 처음 그 기관이 어떤 곳인지 알기 위해 여러 부서를 돌아다녔다. 그때 하루 정도 마주 놓은 책상에서 같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당시 그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말투가 부드러웠다. 친절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 조직에서 성공할 사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그랬다. 내가 변호사를 하면서 바람결에 그가 정보기관 대북 공작의 책임자가 됐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다면 그가 공작원 명왕성을 뒤에서 지휘하는 보스가 아닌가.

그런데 지금, 그가 혼자 쓸쓸한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도 나를 알아봤는지 내게 인사를 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이 시각에 혼자 저녁을?"

내가 물었다.

"정권이 바뀌면서 목이 잘렸습니다."

허탈한 표정이었다.

"백수가 됐네요. 이 나이에 어디 일자리를 얻기도 힘들게 됐습니다. 정보기관 30년 경력이 독이 되네요."

조심스럽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우연히 주어진 기회다.

"공작원이었던 명왕성 아시죠?"

내가 물었다.

"당연히 알죠. 이미 신문에 난 공지의 사실 아닌가요? 이제는 비밀도 아니죠."

그의 표정에 순간 비밀을 누설한 정보기관의 책임자가 떠오른 듯 알 듯 모를 듯한 냉소가 흘렀다.

"제가 대북공작국장이 된 후에 공작원 명왕성을 직접 한 번 만나려고 했어요. 꽤나 활용도가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제 참모들이 하는 말이 국장이 일개 공작원을 직접 만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보류했어요."

역시 그였다. 명왕성 공작의 책임자.

"명왕성의 공작 성과를 어떻게 보세요?"

내 기억으로 그는 나름 정직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침투시켜 북한의 권력 측근까지 접근하게 한 성공적인 공작이었죠. 거기서 상당한 인맥을 구축했죠."

"그러면 정보기관으로서는 계속 활용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요?"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신분이 노출되어 효용 가치가 없어졌죠. 나 역시 정권이 바뀌고 용도 폐기된 거 아닌가요?"

국민을 위한다는 국가는 이면에서 개인을 일회용 물품처럼 취급하는지도 모른다. 그게 첩보기관 비밀공작의 세계였다.

"우리 국에서 보고한 정보를 정보기관장이 자기가 살려고 폭로해 버렸죠. 나쁜 놈이죠. 목숨을 걸고 얻어온 정보를 개인이 이용하고 엉뚱한 사람들을 희생시킨 거죠."

그도 그런 시스템의 핵심 축 아니었던가.

"그러면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론적으로는 그렇지만..."

그의 눈빛이 변했다.

"저는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국가가 가장 교활하다고 생각합니다. 변호사님도 저희 기관에 근무해 보셔서 아시지 않습니까?"

그는 내게는 비밀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후임으로 들어온 정보기관의 책임자나 간부들은 명왕성 공작 문제에 관여하기 싫어하죠. 그러니까 모른 척하고 있는 거죠."

그가 주변을 살피고는 말을 계속했다.

"그래도 민주화가 되니까 나부터 시작해서 명왕성도 목숨을 부지하고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전 같았으면..."

그가 말을 끊었다.

"예전에 공작 임무를 수행한 뒤의 공작원들을 어떻게 처리했죠?"

내가 물었다.

그가 잠시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말해야 할까 말까, 망설이는 것 같았다.

"6.25전쟁 당시 공작원을 처리한 걸 자료에서 본 적이 있어요."

그가 조심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때 하사관들의 소망은 장교가 되는 것이었어요. 공작 임무를 수행하고 오면 장교로 임관시켜 주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돌아온 그 사람들을 임시 소위로 임관시켰어요. 그리고 다음 공작에 투입시켰죠."

그가 목소리를 더 낮췄다.

"그때 비행기에서 그들의 낙하산 줄을 몰래 끊어놨어요.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순간 영원히 입을 다물게 한 거죠."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 놓았다. 입맛이 사라졌다. 비정한 흑역사였다. 그들은 왜 국가에 충성했을까.

국장은 계속 말했다. 마치 오랫동안 쌓였던 것을 토해내는 것처럼.

"저도 눈물이 흐르는 더 무서운 비밀도 있어요."

나는 그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짙은 회의가 서려 있었다.

"그게 뭔데요?"

"이제 시간이 꽤 흘렀으니 말해도 상관없을 것 같아요. 정말 우연하게 알게 된 비밀이니까요."

그가 주변을 다시 살폈다.

"우리가 어렸던 시절 울진 삼척 공비가 들어온 거 기억나시죠?"

"알죠. 북한군 부대가 해안선으로 들어와서 국군과 교전을 벌였었죠."

"그때 기사를 보면 몇 명은 생포했다고 나오죠?"

기억이 났다.

"그 후 그들에 대한 기사가 난 걸 본 적 있어요?"

그러고 보니 그들의 행적에 대해 한 번도 신문이나 잡지에 난 걸 보지 못했다. 내가 중학 시절 청와대를 공격하러 온 무장공비 중 생포된 김신조씨는 여러 잡지에서 보곤 했었다.

"그 사람들 어떻게 된 줄 아세요?"

"어떻게 됐는데요?"

국장이 주변을 살폈다. 늦은 저녁 식당은 텅 비어 있었다.

"우리의 군 공작부대가 북한에 침투할 때 생포했던 그들을 안내원으로 써 먹었어요."

그가 말을 끊었다. 무언가를 결심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나중에 인천 앞바다에서 배에 태워 나가서 바다에 던져 버렸어요. 다 죽여 버린 거죠."

나는 숨이 막혔다. 등골에 전율이 흘렀다.

생포된 공비들. 그들도 누군가의 아들이었을 것이다. 조국을 위해 목숨 걸고 왔다가 포로가 된 사람들. 그들을 이용하고, 입을 막기 위해 수장시켰다.

이면의 국가는 악마였다.

"북파 부대 출신들이 가끔 과격하게 시위를 하죠."

그가 계속했다.

"가스통까지 도로에 놓고 폭발시킨다고 하면서 말이죠. 영화 실미도에 나오는 장면들처럼 죽도록 이용하고 책임지지 않는 게 국가입니다. 그들의 훈련대장들도 칼에 맞을까 봐 쫓기고 있기도 합니다."

"왜 국가가 그랬죠?"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독재 시대는 예산을 마음대로 쓸 수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공작원들에게 약속한 돈을 뒤로 넉넉하게 줘서 그들이 살게 할 수 있었죠."

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민주화가 된 이후는 국회가 예산을 철저히 통제하기 때문에 그런 비밀 공작비가 막혔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부작용이기도 하죠."

나는 조심스럽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명왕성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국장이 나를 보았다.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변호사님, 혹시 명왕성 사건을 맡고 계신 겁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답이었다.

국장이 한숨을 쉬었다.

"법정에 나와 증언해 줄 수 없습니까?"

내가 물었다.

국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섞였다.

"나 자신도 벌판에 버려진 상태입니다. 저는 그 기관의 생리를 압니다."

두려움이 담긴 눈빛이었다.

"입을 잘못 벌렸다가는 이 땅에서 살기 힘들 겁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변호사님."

그가 간청하듯 말했다.

"제 이름조차 거론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와 헤어졌다.

희미한 가로등 아래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이 한없이 쓸쓸해 보였다.

한때 정보기관의 핵심이었던 사람. 국가를 위해 일했던 사람. 지금은 제 이름조차 숨겨달라고 애원했다.

나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국장도, 명왕성도, 그들이 이용했던 공작원들도, 모두 같은 시스템의 희생자였다.

하지만 차이가 있었다.

명왕성은 법정에 서겠다고 했다. 국장은 이름조차 숨겨 달라고 했다.

 


 

 

#국장의변명 #판결문한장4 #엄상익에세이 #엄상익변호사 #엄상익못다한이야기

 

 

저작권자 © 최보식의언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