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의 관찰인생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엷은 어둠이 창문으로 스며들었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적막한 사무실에 잔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저녁 여섯시 반. 약속 시간이 됐다.
그가 올까. 박민영 사장을 통해 전갈을 보냈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남과 북 양쪽에서 쫓기는 사람. 유령처럼 살아가는 공작원.
창밖에 서 있는 외눈박이 가로등의 불빛이 켜졌다. 불빛이 밝아져 감에 따라 이면도로가 점점 어두워져 갔다.
소리없이 문이 열렸다. 그림자같이 한 남자가 들어왔다. 명왕성이었다.
넓적한 앞이마에 움푹 들어간 눈이 나를 날카롭게 살피고 있었다. 사십대 중반쯤 되어 보였지만, 그는 죽음 저쪽으로 갔다 온 눈빛이었다.
온 몸이 면도날 같은 신경줄로 구성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보지 않으면서도 주변을 다 보고 있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그에게 소파를 권했다. 그가 소파에 앉았다. 하지만 등을 기대지 않았다. 언제든 반사적으로 행동할 준비가 된 자세였다.
"지금 남쪽과 북쪽 양쪽에서 쫓기고 있습니다."
인사도 없었다.
"남쪽에서는 비밀을 영원히 지우기 위해 내가 없어져야 하고, 위장 귀순을 했던 북쪽에서는 배신자가 되어 추적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남쪽보다 북한의 독침이나 권총이 더 두렵습니다."
액션영화의 한 장면이 내 앞에 있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현실이었다.
"저는 공작에 박민영 사장과 그의 광고회사를 이용했습니다."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공작을 한 국가에서 배상을 해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박민영 사장의 희생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 겁니다. 공작원은 냉철해야 하지만 양심이 아픕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해줘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왔습니다."
위험에 처해 있으면서도 당당한 태도였다.
"저는 박민영 사장의 소송 대리인입니다."
나도 신사가 될 필요가 있었다.
"공작 비밀을 알고 싶지 않습니다. 소송에 필요한 만큼만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는 바닥을 내려다 보면서 침묵했다.
"공작원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비밀을 지키는 게 원칙이지만, 국가가 저를 배신하고 박민영 사장을 희생시켰습니다. 굳이 비밀을 지켜야 할 의무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제는 저 자신을 위해, 그리고 제가 피해를 입힌 박민영 사장을 위해 말하겠습니다."
그의 눈에서 은은한 분노가 타올랐다. 동시에 서글픔도 보였다.
"저는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근무했습니다."
그가 말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정보기관으로부터 은밀한 제안이 있었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국가에 헌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공작원들은 소리 없이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다시 창밖을 향했다. 파란빛의 수은등 아래서 고양이 한 마리가 주위를 살피며 소리없이 걷고 있었다.
"그때부터 인생 항로가 바뀐 겁니다. 명왕성이라는 암호명을 부여받고 비밀 공작원이 된 겁니다."
"왜 받아들였습니까?"
인생은 한번뿐이었다. 그건 소리없는 죽음의 길일 수도 있었다.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는... 명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군복 것보다 더 큰 방식으로 나라를 지키는 거라고."
그의 목소리에는 회의가 깃들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순진했죠. 국가가 나를 지켜줄 거라고 믿었으니까. 어려서부터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고 배웠으니까."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한때는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려 했던 젊은 장교. 나도 그랬다. 신문에 난 그의 이력을 보았다. 그가 전방에서 근무하던 육군 대위 시절 나도 그 부대에서 같은 계급이었다. 우리는 군 시절을 공유하고 있었다. 서로 알지는 못했지만. 지금 나는 변호사고 그는 남북 양쪽에서 쫓기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됐다.
"제가 북한으로 위장 귀순하는 공작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철저히 나를 망가뜨려야 했습니다."
북한으로 가야 할 이유를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한판의 거대한 연극이 공작이니까.
"술과 도박에 빠지고 조직에 대한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사는 무능하고 방탕한 인물로 변신해야 했습니다. 동료들에게 돈을 빌리고 갚지 못하는 신용불량자로 만들어졌습니다. 불명예스럽게 군복을 벗는다는 각본이었습니다."
그가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믿을 수 있겠느냐는 눈빛을 보냈다.
"국가를 위한 철저한 연극이었습니다. 공작원은 자신의 운명까지도 송두리째 바꿔 가며 온몸을 던져야 하는 겁니다. 북한이 나를 포섭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 되어야 하니까요."
사회에서 자신이라는 존재를 철저히 부숴 뜨리는 행위였다. 영화 같으면 배역이 끝나면 곧 본래의 자기로 돌아온다. 그는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왜 사회적 자살을 받아들였을까.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일까.
"제 아내도 몰랐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남편이 술주정뱅이가 되고 도박에 빠져 빚쟁이들이 집에 찾아오는데... 그게 국가를 위한 연극이라는 걸 아내는 몰랐어요. 아내의 눈빛이... 저를 경멸하는 걸 봐야 했습니다. 그것도 공작의 일부였으니까요."
그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동료들은 저를 쓰레기 취급했습니다. 빌려 간 돈을 갚지 않는 인간 말종. 술 먹고 상관에게 욕설하는 쓰레기.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완벽하게."
그가 잠시 말에 틈을 두었다. 그리고 자기의 말이 나의 뇌리에 완벽하게 스며들때까지 기다리는 것 같았다.
"저는 군에서 쫓겨난 실업자가 되어 광고 프로듀서 출신인 박민영 사장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습니다."
나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박민영 사장의 대북 광고 사업에 자연스럽게 편승했습니다. 그 회사의 전무라는 위장 신분까지 취득했죠. 북한 땅을 합법적으로 드나들 수 있는 자격과 통로를 확보한 겁니다."
"박민영 사장이 눈치 채지 못했습니까?"
내가 물었다.
"신뢰를 얻기 위해 모든 걸 했죠.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함께 기다리고, 주말에 가족끼리 놀러가고, 밥도 같이 먹고 밤 늦게까지 그의 꿈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는 박민영 사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안면마비로 반쪽만 움직이는 입. 그가 이웃을 친구로 믿었던 그 순진함.
"그게...미안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공작원에게 양심은 사치입니다. 그렇게 배웠으니까요."
하지만 그의 눈빛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미안하다고. 후회한다고.
"1990년대 북한은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리는 극심한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그가 주제를 바꿨다.
"체제유지를 위한 외화벌이가 절박했습니다. 그런 북한에게 남한의 광고사업은 달콤한 외화벌이였습니다. 그들은 경계심을 풀고 저를 대했습니다. 북한의 핵심부로 들어갈 수 있었죠."
"그들이 쉽게 믿던가요?"
"아닙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저를 의심했습니다. 당연하죠. 갑자기 귀순한 남한 군장교 출신이니까요. 평양 보위부의 지하실로 끌려갔습니다. 심문이 시작됐죠. 밤새도록."
그는 기억을 되살리는 표정이었다.
"제가 만들어낸 망가진 인생이 저를 구해줬습니다.그리고 저는 북한 권력의 중심부와 접촉할 수 있었습니다."
창밖은 짙은 어둠으로 변했다. 인적 없는 길에 수은등만 파랗게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어떤 정보를 수집했습니까?"
그가 주저했다.
"변호사님, 이 부분은..."
"소송에 필요한 만큼만 말씀하시면 됩니다."
"북한 고위층의 대남 공작에 관한 정보였습니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특히 남한 정치와 관련된 것들이요."
"예를 들면?"
"남한에서 대통령 선거철이 되면 일부 정치인들은 북경에서 북한의 권력자들을 은밀히 만났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휴전선 부근에서 긴장을 고조시켜 달라고 부탁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보수 진영에 유리하게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요. 제가 직접 목격한 적도 있습니다."
"직접 목격했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1990년대 후반이었습니다. 북경의 한 호텔에서... 저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통역 겸 연락책으로요."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가 말할 수 있는 선이 있을 것이다.
"전쟁을 하는 것보다 남조선 대통령 선거 때 공작을 하는 게 훨씬 더 대남공작에 유리하다는 겁니다. 휴전선에서 포 한 방을 쏘면 당장 선거 분위기가 보수적이 되니까요. 그런 주문을 받고 뒷돈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북측의 고위 당국자는 결국 저를 다시 남측으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남쪽의 거점 확보를 위해 광고회사를 차리고 남측의 모든 정치정보를 빼내 달라는 겁니다."
"이중 공작원이 된 겁니까?"
"그렇습니다. 북한의 보위부와 남한의 안전기획부, 양쪽의 공작원이 된 셈입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북 정보기관의 지원하에 저는 빠른 시간 내에 거물급이 되어 버렸습니다. 북한을 촬영하려는 방송국이나 대북사업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저는 그 열쇠를 가진 인물이 되었습니다. 북한 최고 권력자와 줄이 닿게 된 제가 투자자를 모으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창밖을 보았다.
"저는 총선이나 대선 무렵 갑자기 나타나는 북한의 돌발적인 행동이나 의도적인 공포 분위기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대통령 후보들이 북의 인심을 얻기 위해 자행하는 수많은 뒷거래를 목격했습니다."
나는 듣고 있었다. 또 다른 세계.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못하는 권력의 이면.
"그렇게 공작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변했다. 분노가 섞여 들어왔다.
"1998년까지는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김대중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그가 말했다.
"안전기획부장은 그동안 제가 수집한 첩보들을 무기로 김대중 대통령을 압박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가 말을 끊었다. 주먹을 쥐었다.
"저의 정체와 위장 광고회사가 언론에 노출됐습니다."
"1998년 3월 17일."
그가 날짜를 정확히 말했다.
"그날 한겨레신문에 제 공작이 폭로됐습니다. 암호명까지. 출입국 기록까지. 전부."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는... 믿을 수가 없었어요. 제가 목숨 걸고 수집한 정보를, 안기부장이 정치적 카드로 쓰면서 저를 불태워버린 겁니다. 가장 비밀을 지켜야 할 정보기관의 책임자가 박민영 사장과 그 가족, 저와 제 가족의 생명까지도 위험에 빠뜨린 겁니다."
그의 얼굴에 분노가 일었다.
"그날부터 저는 시체나 다름없었어요. 북에서는 배신자, 남에서는 용도폐기. 제 가족도, 저를 믿었던 사람들도, 모두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순찰차가 경광등을 번쩍 거리며 적막한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가 일어섰다.
"변호사님, 저는 법정에 서겠습니다. 박민영 사장을 위해서 최소한의 인간적인 도리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한참 창 밖을 바라봤다. 국가가 회피하는 일을 그가 하려고 한다. 이렇게 국민에게 비겁하게 해도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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