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기어오르던 구더기는 언제 옆 친구를 쳐다볼까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나이 칠십이 되면서 동해 바닷가로 내려왔다. 4년이 흐르면서 따뜻한 이웃들이 땅속에서 버섯이 솟아오르듯 생겨났다.
이틀 전 해가 질 무렵, 우연히 밥집에서 옆자리에 앉았다가 알게 된 공무원을 다시 만났다. 묵호 등대 옆 단골 찻집이었다. 찻집 주인이 내게 자신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같은 드론을 보여주면서 자랑했다.
그는 대기업에서 세계를 돌아다니며 일을 하다 동해 바닷가 등대 옆에서 살고 있다. 차도 끓이고 장작도 패고 재미있게 노후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내게 화목난로를 보여주기도 했다.
등대 불빛이 빙빙 돌면서 밤바다 위를 훑기 시작했다. 대추차를 한모금 들이켠 공무원이 말했다.
"저는 30대 말까지 신림동 고시원에서 사법고시를 준비했습니다."
그가 순간 과거로 돌아간 눈빛이었다.
"결국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마흔에 다른 공무원 시험을 쳐서 지금 여기 동해에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상하게 50년 전 신림동 고시원 화장실이 떠올랐다.
세로로 간신히 누울 수 있는 쪽방이었다. 가로로는 누워지지 않았다. 발을 벽으로 올려야 했다.
그곳에 묵는 오십 명이 재래식 화장실 두 개를 공동으로 사용했다. 아침이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볼일을 보고 나오면 한참 동안 뛰면서 옷에 밴 냄새를 털어냈다.
어느 날이었다.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똥통에서 버글거리던 구더기 몇 마리가 벽을 타고 올라와 내 시야에 들어왔다.
하얀 구더기는 작고 통통한 온몸을 꼬부렸다 폈다 하면서 죽을 힘을 다 해서 가파른 벽을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그걸 보는 나는 궁둥이를 살짝 밀어 올려주거나 아예 목적지까지 가져다 주고 싶었다.
다른 구더기들도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벽 위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구더기들에게 똥물이 더럽다는 인식이 있을까. 그들이 태어난 곳이고, 그들이 편하게 살아가는 세상이었다. 마침내 몇 마리가 나의 눈높이를 넘어 천정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천정에는 뭐가 있을까. 거미줄과 바짝 마른 파리 시체가 대롱거렸다.
최선두로 올라가던 구더기가 어느 순간 힘을 잃었는지 툭 떨어졌다. 구더기는 바닥에서 버둥거렸다. 갑자기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 같았다. 이어서 그 뒤를 따르던 구더기가 떨어졌다. 좀 더 높이 올라갔던 것도, 덜 올라갔던 것도, 모두 떨어졌다. 끝까지 가는 게 없었다. 그래도 그걸 모르는 구더기들은 밑에서 벽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생각했다.
하나님이 보기에 인간은 구더기 같은 존재일 수도 있지 않을까. 고시에 합격해도 결국은 저 구더기들처럼 벽을 오르다 떨어져 바닥에서 버둥거리지 않을까. 고시에 합격한 사람은 조금 더 벽 위를 올라간 구더기였다. 결국은 다 떨어지게 되는 운명인데 그게 무슨 의미였을까.
고시원 생활을 하던 나는 시험에 합격했다. 군 직업 장교 생활을 거쳐 공무원이 되었고, 나중에는 변호사가 되었다.
조직 안에서 주류를 이루는 가치관이 있었다. 승진의 벽을 얼마나 빨리, 높이 오르느냐였다. 구더기같이 젖 먹던 힘까지 내서 꿈틀대며 벽을 오르는 모습이었다. 고시 합격이라는 것도 별 것 아니었다. 벽의 중간쯤부터 다시 오르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본질은 같았다. 결국은 다 떨어져서 바닥에 뒹굴 수 있었다.
내가 살아온 이 세상은 더러운 똥물 같기도 했다. 그 속에서 지지고 볶고 싸우고 했다. 거기서 조금이라도 높이 올라가려고 경쟁을 벌였다.
어쩌면 우리들 모두가 구더기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날 교대역 지하철에서 우연히 한 노인을 봤다. 세월이 흘렀지만 내가 군 시절 모셨던 육군 대장 출신 장군이 틀림없었다.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근처 식당으로 모시고 가서 같이 밥을 먹었다.
"얼마 전 장군들 모임에 나갔었어."
그가 말했다.
"그런데 밥값을 낼 장군이 없는 거야. 돈들이 없는 거야. 할 수 없이 내가 냈어."
장군을 지냈어도 돈이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들의 빛나는 계급장만 봤다. 바닥으로 내려와 당황하고 꿈틀거리는 건 상상하지 못했다. 그들은 높이 올라갔다. 그리고 결국 떨어졌다. 지하철역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는 노인이 된 장군의 뒷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몇 달 전, 바닷가 내 집으로 옛 상관이 찾아왔다. 장관을 지낸 분이었다. 내가 부하였을 때 그는 거의 신 같이 느껴졌다. 하나님은 못 해도 그는 나를 승진의 벽 높이 올라가도록 현실에서 밀어줄 힘이 있었다.
같이 곰치국을 먹었다. 차를 나누었다.
'꼬붕'이었던 내가 '오야붕'하고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이 되니 다 기어 오르던 벽에서 떨어져 뒹굴면서 평등해졌다.
나는 어디쯤 올라갔던 걸까. 중간쯤? 중간보다 조금 위? 돌이켜 보니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떨어질 거였다.
어둠의 밀도가 짙어지고 등대 불빛이 선명하게 밤바다를 휘젓고 있었다.
"제 공무원 생활도 이제 5년 정도 남았습니다."
그는 마흔에 벽 오르기를 포기하고 동해까지 흘러왔다. 그의 목소리에 얹혀 있는 파도가 체념인지 평화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조용히 멀리 산의 위아래 집에서 반짝이는 불빛들을 내려다 보았다.
나는 이제 안다. 우리는 모두 구더기였다. 어떤 이는 높이 올랐고, 어떤 이는 일찍 떨어졌고, 어떤 이는 중간쯤에서 포기했다. 그런데 결국 모두 같은 바닥에서 만난다.
장군도, 장관도, 변호사도, 실패한 고시생도.
바닥에 떨어진 구더기들은 더 이상 위를 보지 않는다. 처음으로 옆을 본다. 그리고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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