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존재가 자기에게 테러를 가한다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2003년 5월 17일 오후 3시. 서울형사지방법원 311호 중법정.

납같이 무거운 공기가 법정을 짓누르고 있었다. 방청석이 가득 차 있었다. 기자들이 보였다. 유명 감독의 딸 살해 사건이라 언론의 관심을 끄는 것 같았다. 

방청석의 중간쯤에 정일경 감독이 보였다. 그 주위에 일행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앉아 있었다. 매번 그들은 단체로 몰려와 재판 진행을 감시했다. 그 옆쪽에 홍진욱의 누나와 여동생이 죄인이 되어 숨죽이고 앉아 있었다.

피고인석에 홍진욱이 앉아 있었다. 바짝 말라 붙은 겨울나무였다. 구부정한 등 위에 하얗게 바랜 얼굴이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순간 눈이 번쩍였다. 모순 같은 이중성이 느껴졌다. 그게 뭘까. 그의 안에는 두 존재가 공존하는 게 아닐까.

나는 변호인석에 앉으며 서류 가방을 열었다. 서류들을 꺼냈다. 며칠 전 구한 진단서를 맨 위에 놓았다.

방청석을 둘러보았다. 정일경 감독과 시선이 마주쳤다. 경멸의 빛이 날아왔다. 나는 움찔했다. 그 일행들이 쏘아 대는 증오의 화살들이 앞에 서 있는 홍진욱의 등허리에 날아가 박혔다.

재판이 시작됐다.

검사가 홍진욱에게 확인했다.

"부인을 살해한 건 맞죠?"

"아닙니다.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방청석에서 정 감독이 일어나는 게 보였다.

"야 이 개새끼야"

고함이 터져 나왔다.

"네 놈이 내 딸을 죽이고 뭐라고?"

그가 당장이라도 뛰쳐 나올 기세였다. 옆에서 같이 온 일행이 그를 잡았다. 잠시 후 법정에 잠잠해졌다.

"계속 신문하시죠"

재판장이 말했다. 검사가 다시 시선을 홍진욱 쪽으로 돌렸다.

"부인이 바람을 피고 있다고 의심했죠?"

"의심했죠. 그렇지만 저는 정신적으로 혼란스런 상황이었습니다."

"정신적으로 혼란스럽다?"

검사의 표정에 비웃음이 비쳤다.

"내가 누군가의 지배를 받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홍진욱은 진실이다. 나는 안다. 악령을. 열일곱 살 때 나도 겪었다. 그놈이 법정에도 와 있을까? 홍진욱의 속에 숨어 있지 않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집중해야 했다.

"불륜을 의심했으면 부인이 미웠겠네."

검사가 그를 치정 쪽으로 몰았다.

"의심은 했지만 사이는 좋았어요."

그때 재판장이 끼어들었다.

"확인을 하고 넘어갑시다. 의심을 한 게 사실입니까? 아닙니까?"

"진심으로 의심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모호한 대답이었다. 재판장이 '이것 봐라?'하는 눈빛으로 변했다.

"의심을 했다는 건가요 아닌가요?"

"반쯤만 인정하겠습니다."

재판장의 눈빛에 날이 섰다. 그때였다. 방청석에서 고함이 터졌다.

"야 이 새끼야 장난치지 마."

정일경 감독의 옆에 있던 남자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함께 온 듯한 남자들의 눈빛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조용해 주십시오"

재판장이 방청석을 향해 경고했다. 법정이 조용해졌다. 그가 홍진욱을 내려다 보았다.

"피고인은 정신적으로 혼란한 상태라고 했는데 자기의 정신상태를 자기가 판단하는 건가요?"

묻는 재판장의 눈빛이 서늘했다.

"그렇습니다."

방청석이 술렁였다. 탄식 소리가 들렸다.

다음은 변호사인 내가 신문할 차례였다. 증오와 경멸의 눈길이 벽처럼 나를 둘러쌌다.

"피고인 홍진욱은 정신 분열증 진단을 받은 사실이 있죠?"

"있습니다."

"어떤 증상이었죠?"

"'그놈'이 나를 힘들게 해서요."

나는 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 재판장도 알 턱이 없다. 나는 홍진욱에게 묻지만 그놈이 속에서 듣고 있다.

"정은희의 죽음을 인정하나요?"

"아니요. 인정하지 않습니다. 지금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홍진욱의 목소리가 변했다. 아니 다른 소리가 섞여 나왔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장인은 처음부터 나이 먹은 나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죠. 딸을 데려가려고 생쑈를 벌이는 겁니다."

방청석 가운데에서 정일경 감독이 벌떡 일어났다. 눈에서 파란 불꽃이 일었다. 옆에 앉은 남자들이 그를 잡았다. 앞좌석의 등받이를 손에 잡고 그는 몸을 떨었다.

"피고인에 대한 정신과 진단서는 뭐죠?"

나는 진단서를 손에 들고 그에게 보였다.

"후배가 저를 강제로 끌고 간 겁니다. 멀쩡한 저를 의사들과 작당해서 정신병자로 만들었죠. 그래야 은희를 도로 데려갈 수 있으니까요."

그는 구치소에서 나를 만났을 때와 전혀 다른 인격으로 변해 있었다.

"정은희를 죽였다고 자백하지 않았나요?"

"아니예요. 그놈이 형사로 위장해서 내게 다가온 거였어요. 저는 은희를 끔찍이 사랑했어요."

"신문을 마치겠습니다."

나도 혼란스러웠다.

다음은 증인 신문이었다. 정신과 의사가 증인석에 올라와 앉았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홍진욱은 어떤 상태였습니까?"

"의사들의 회의 결과 정신분열증이란 진단을 내렸습니다."

"어떤 증상을 호소했나요?"

"어떤 존재가 자기를 괴롭힌다고 하면서 두려워했습니다."

'그놈'이었다. 의사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는 의학 용어 같지만 나는 안다. 의사의 말이 이어졌다.

"망상 속에서 일어나는 게 그에게는 사실이고 실제입니다. 예를 들면 그 존재가 자기에게 테러를 가한다는 망상 속에서 공격적이 될 수 있습니다."

"집안에 가득한 놓은 칼이나 가스총들이 그런 것들을 말해주는 것인가요?"

"그럴 수 있습니다."

"잠깐만요."

검사가 끼어들었다.

"그동안 피고인의 행위를 보면 기억력과 지능, 그리고 판단력이 정상이라고 보입니다. 살인을 할 당시 망상이 아니라 정상적인 상태에서 범행을 할 가능성은 없습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통의 생활은 정상으로 할 수 있으니까요."

"진단 받을 때 의사를 속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지능이 높은 사람은 의사들을 속일 수도 있습니다. 세심한 관찰이 필요했습니다."

검사가 자리에 앉았다.

변호사인 내가 신문을 계속했다.

"피고인의 경우 치료될 수 있었습니까?"

"중요한 것은 환자가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걸 자각하느냐입니다. 대부분은 자기가 정신 분열증에 걸린 걸 모르고 망상 속에 있으니까요."

의사가 피고인석의 홍진욱을 바라 보았다.

"홍진욱 씨의 경우 스스로 정신과 진단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마귀에게 잡힌 것 같다고 했습니다. 기도원에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 병인을 제거해 주면 정상이 될 수 있습니다."

열일곱 살 때 어머니는 나를 여러 병원의 정신과를 데리고 다녔다. 영의 세계를 안다는 베드로 병원의 의사는 "너는 약으로 고칠 병이 아니다"라고 했었다. 홍진욱도 그런 처방이 있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읍시다."

검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증상의 환자가 재판을 받을 때 정신 상태는 어떻다고 보십니까?"

"두세 가지 의식이 겹쳐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자아 밑에는 다른 게 흐를 수 있습니다. 깊은 내면은 소용돌이치는 혼돈 속에 있을 겁니다."

이어서 장영식 피디가 증언석에 올라왔다. 내가 신청한 증인이었다.

"피고인을 정신과에 데려가 진찰을 받게 한 적이 있죠?"

방청석의 시선들이 그를 향했다. 정일경 감독의 얼굴이 보였다. 회색빛 얼굴, 꽉 다문 입술. 그가 의심의 눈빛으로 장영식을 보고 있었다. 아니, 그를 뚫고 피고인석의 사위를 보고 있었다.

"진욱이 형이 사무실에 있다가도 공포에 떨었어요. 다른 선배들 중에서도 그런 증세를 보이는 사람을 본 적이 있어요. 의사들은 그런 사람들 대부분은 자살하거나 다른 사람을 해친다고 했죠. 진욱이 형이 바로 그랬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부인인 정은희 씨한테 그런 말을 해 줬는데 화를 내더라구요."

"왜요?"

"남편이 최고의 영화감독이 될 사람인데 내가 재를 뿌리는 것 같았나 봐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내가 진욱이 형을 달래서 정신과에 데리고 갔죠. 친형제 같은 정에서 그렇게 한 거죠."

그가 피고인석의 홍진욱을 보았다. 눈에 물기가 스몄다.

"정은희씨가 엄청나게 화를 냈어요. 당신이 뭔데 남의 남편을 정신병자로 만들려고 하느냐고 했죠. 만드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런데 고쳐야 할 것 같았습니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홍진욱 살인을 어떻게 보십니까?"

"홍진욱 형이 죽인 게 아닙니다. 정은희 씨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겁니다. 그 여자가 가지고 있던 야망이 자신을 죽인 겁니다."

"야 이새끼들아"

뒤에서 고함이 터졌다. 정 감독의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재판장님! 저놈들이 짜고 공작을 하고 있습니다. 내 딸이 죽었습니다. 저 놈도 꼭 죽여 주십시오."

그가 울부짖었다. 증언이 끝났다. 판사들이 퇴장하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텅 빈 법정의 가운데 홍진욱이 혼자 서 있었다. 교도관이 그에게 수갑을 채우고 포승으로 묶고 있었다. 순간 그가 뒤돌아서 나를 힐끗 보았다. 그의 얼굴에 다른 얼굴이 겹쳐 보였다. 웃고 있는 하얀 탈의 모습이었다. 순간 그 것이 사라졌다.

법정문을 열고 나왔다. 텅 빈 복도를 걸어나왔다. "그놈"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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