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관찰인생]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라고 해."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구치소를 나섰다. 주차장까지 높은 담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찬바람이 흙바닥의 먼지를 일으켰다. 신비한 사건이었다. 홍진욱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메아리쳤다.
"창문으로 스며들 듯이 들어왔어요."
"서서히 목을 졸랐어요."
그와 마주했던 순간 가슴에 검은 연기가 꽉 들어찼었다. 머릿속의 회로가 마구 뒤엉켰다. 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다.
차에 올라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안개같이 홍진욱에게 스며든 그 남자는 내가 열 일곱살 때 만났던 존재와 흡사한 것 같았다.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정체불명의 조종자.
차의 시동을 걸었다. 잠자던 엔진이 몸을 부르르 떨고 일어났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었다. 가방을 받아 드는 아내에게 말했다.
"내가 열일곱 살 때 겪은 이상한 체험을 당신한테 말한 적 있지? 귀신이 들었다고 하기도 하고 어머니가 나를 신경정신과로 데리고 갔던 거 말이야."
"그런데요?"
"오늘 내 증세와 비슷한 사람을 만났어. 살인까지 했지."
"당신한테 다른 게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요"
아내가 섬뜩해 하는 표정이었다.
"왜?"
"그런 것들은 수시로 옮겨 다닐 수 있어."
잠이 오지 않았다. 서재로 가서 책상 앞에 앉았다. 밀도 짙은 어둠이 창문을 검은 거울로 만들었다. 그 속에 내가 비쳤다. 순간 내 뒤로 다른 그림자가 겹쳐 보였다. 뭘까? 다시 봤다.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존재가 아직도 내 주위에 서성거리는 건 아닐까.
나는 청록색 세월의 안개 저쪽에 있는 까까머리 소년을 만나고 있었다.
1971년 7월 15일 밤.
신설동 골목의 일본식 이층 목조주택. 내 방은 2층 끝방이었다. 그날 밤은 더웠다. 창문을 열어 놓고 잤다.
새벽 1시. 나는 갑자기 눈을 떴다. 열린 창문 턱 바로 위로 하얀 것이 떠 있었다. 솜덩어리 같았다. 하얀 안개 덩어리 같기도 했다. 검은 어둠 속에서 펄럭이는 흰 빨래 같이 희미한 빛이 흘렀다.
허공에 떠 있는 그 존재가 나를 비스듬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보고만 있었다.
순간 허공에 떠 있던 그것이 갑자기 내게로 날아왔다. 이마 한가운데를 그 존재가 뚫는 느낌이었다. 순간 움찔했다. 그 존재가 머리 속을 파고 들었다. 그게 머릿속을 한 바퀴 꿈틀거리고 돌았다. 징그러운 느낌이었다. 그리고 잠잠해졌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꿈이 아니었다. 분명히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통증도, 어지럼증도 없었다.
나는 다시 누웠다. 잠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 며칠 후. 저녁이었다. 2층 가운데 방 다다미 위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었다. 머리맡 낭하로 누군가 지나갔다. 여자였다. 삼십대쯤. 짧은 파마머리. 약간 뚱뚱한 몸매에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그 여자가 끝방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내 방이었다.
'저 여자가 누구지?'
모르는 여자였다. 일본식 목조 주택의 낭하는 사람이 지나갈 때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그 여자는 미끄러지듯 소리없이 지나갔다.
나는 벌떡 일어나 끝방으로 갔다. 문을 열었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숨을 곳도 없었다. 텅 빈 허공이었다. 그녀는 사라졌다. 내가 본 게 무엇이었을까.
한 달 후. 밤 12시. 낡은 벽시계가 종소리를 울렸다. 나는 자리에 누웠다. 어느 순간 내가 허공에 떠 있었다. 높지는 않았다. 삼십 센티미터쯤. 아래를 봤다. 자고 있는 내가 보였다.
내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왔다. 이게 죽는 거구나. 나는 안간힘을 썼다. 살려 주세요 라고 소리쳤다. 입에서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새끼 손가락이 까딱하고 움직이는 감각이 느껴졌다. 순간 나는 내 몸 속에 돌아와 있었다. 벌떡 일어났다. 진땀이 흘렀다.
그다음부터는 매일 밤 12시를 넘으면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 나는 두려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상한 증상들이 더 나타났다. 환청이 들렸다. 기계의 날카로운 회전음. 그리고 그것이 나타났다. 내 발치에. 매일 밤. 나를 내려다 보았다. 1미터쯤 되는 길이의 유체였다. 희미한 하얀색을 띠고 있었다. 텔레파시가 통하는 것 같았다. 무서웠다.
그 유체는 내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았다. 나는 거부했다. 좋은 명령이 아닌 것 같았다. 대항해야 했다. 이게 귀신인가. 나는 귀신을 쫓는 주문을 외웠다. 요 밑에 칼을 깔고 잤다. 그래도 그 존재는 찾아왔다. 어떤 날은 내 밑에 있는 칼로 누군가를 찌르라는 것 같았다. 그게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점점 공포가 심해졌다. 마당에 나가 세수를 해도 구석에서 그 존재가 나를 보고 있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몸이 점점 말라 들어갔다. 도저히 견디기 힘들어 엄마에게 사실을 얘기 했다.
엄마는 주변 사람들에게 내 증상을 얘기했다. 귀신이 들었으니 굿을 하라는 사람이 있었다. 엄마는 나를 동네에 있는 신경정신과 의원으로 데려 갔다. 의사는 스트레스라고 하며 잠자는 약을 지어주었다. 그 약을 먹어도 전혀 효과가 없었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피폐해지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엄마와 아버지의 걱정이 심해져 갔다.
엄마는 나를 명동에 있는 성모병원 신경정신과로 데려갔다. 거기서도 명확한 진단이 나오지 않았다. 나의 일상생활은 정상이었다. 공부도 정상적으로 하고 특이한 행동은 없었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나를 데려간 곳은 혜화동에 있는 '베드로 병원'이었다. 귀신을 알아보는 특별한 의사가 있다는 소문이 난 병원이었다. 진찰실에 들어갔다. 의사가 나의 얘기를 듣고 나더니 한참을 쳐다 봤다.
"이건 약으로 고칠 병이 아니다."
그의 어조가 단호했다.
"너한테 매일 밤 나타나는 게 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올 때 넌 어떻게 하니?"
의사는 나를 직시했다.
"살려고---몸부림 쳐요"
의사가 고개를 저었다.
"절대 이기려고 하지 마라."
"예?"
"넌 그걸 이길 수 없어. 이기려고 하면 결국 지게 돼."
나는 떨렸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의사가 내 눈을 똑바로 보았다.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라고 해."
나는 숨이 막혔다.
"죽는 건가요?"
"아니 받아들이는 거다"
의사가 덧붙였다.
"두려워하면 그것은 더 강해진다. 두려움을 놓으면 그것은 힘을 잃는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음날 밤 그것이 다시 왔다. 내 발치에 서서 나를 내려다 보았다. 나는 눈을 감고 속으로 말했다.
'이제 지쳤어. 네 마음대로 해.'
무서웠다. 하지만 말했다.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해.'
그것이 움직였다. 내 위로 천천히 내려왔다. 나를 덮었다. 나는 그것을 느꼈다. 무겁지 않았다. 차갑지도 않았다. 그냥 있었다. 이상했다. 갑자기 빈방에서 사라진 여자가 떠올랐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것이 사라졌다. 다음날 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일주일 후 한 번 왔다. 한달 후 다시 한번. 그리고 사라졌다. 나는 치유됐다. 아니 치유가 아니었다. 나는 바뀌었다. 그것을 보게 됐다. 그것과 함께 살게 됐다.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17세 그 여름. 나는 다른 사람이 됐다.
열일곱 살 때 빙의 체험은 아주 없어진 건 아니었다. 그 후로도 유체 이탈은 종종 있었다. 가끔 이상한 게 보였다. 혼자 어두운 산길을 가다가 바위 아래 사람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순간 다시 보면 아무도 없었다. 그런 현상은 나이를 먹어도 계속됐다.
삼십대 중반의 어느 날이었다. 새벽 4시경 체육관으로 갔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무도 없었다. 그 순간 벽에 한 여자가 등을 붙이고 서 있는 게 보였다. 파란 바지를 입고 긴 머리를 한 여자였다.
다시 보니까 그 여자는 순간 사라졌다. 그런 경험은 계속됐다. 그러나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17세, 그 여름 나는 배웠다. 그들과 함께 사는 법을. 오히려 나는 그들을 이해하게 됐다.
그래서 30년 후 홍진욱을 만났을 때 나는 알아봤다. 그도 보고 있었다. 같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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