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하고 혁명적인 행위
[최보식의언론=이병태 카이스트 명예교수]

"기독교는 위험한 신앙이다 (Christianity Is a Dangerous Faith)"
뉴욕타임스 12월 21일자에 게재된 데이비드 프렌치(David French)의 칼럼 제목이다. 비기독교인을 포함해 우리에게 여러 생각을 갖게 하는 도발적이며 반전의 묘미를 보여주는 글이다. 아래는 칼럼 전문이다. (편집자)
종교는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힘 중 하나입니다.
진정한 근본주의자들을 만나본 적이 있다면 그 이유를 아실 겁니다. 영원히 걸린 문제(내세의 운명)와 절대적인 확신이 결합하면, 신의 이름으로 잔인해지는 것을 기꺼워하는 사람들이 만들어집니다.
사실, 그들은 자신의 잔인함을 일종의 '친절'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만약 당신을 온정적으로 대한다면, 당신이 죄를 짓는 상황에 안주하게 만드는 것 아닐까요? 그러므로 기회가 될 때마다 사람들과 맞서고, 그들이 틀렸다고 말해주는 것이 그들에겐 중요합니다. 종종 가장 강경한 태도로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어떻게 자기 죄의 심각성을 깨닫겠습니까?
근본주의자들에게 있어 의견 차이는 곧 '배교(apostasy)'의 증거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쁜 점은, 당신이 틀렸다면 다른 사람들까지 오류로 이끌 수 있고, 그렇기에 당신은 '위험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종류의 근본주의자들이 그토록 열성적인 검열관이 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근본주의자는 오류를 범한 사람 한 명 한 명을 이교주의(paganism)라는 잠재적 전염병의 '최초 감염자(Patient Zero)'로 봅니다.
그리고 동료 신자라고 해서 근본주의자들의 분노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들이야말로 주된 표적입니다. 동료 신자들은 오류에 대한 변명의 여지가 없기에, 가장 독설적인 비난을 받습니다.
이 원칙은 '세속적 근본주의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만나보셨을 겁니다. 자신의 정치적 성향으로 정체성을 규정하고, 이견에 대해 냉소적인 경멸을 보내며, 누가 발언권을 얻고(platformed) 누가 얻지 못하는지에 대해 매우 깊은 관심을 두는 사람들 말입니다.
제가 지금 하는 말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류의 마음에 신앙의 불꽃이 처음 일었을 때부터 사실이었던 관찰을 전달하는 것뿐입니다. (우리 안에는) 조용하고 어두운 목소리가 속삭입니다.
"네가 옳다. 그들은 틀렸다. 네가 지배하는 것이 모두에게 최선이다."
이제 성탄절(Christmas) 이야기를 해봅시다. 매년 이맘때면 미국 기독교계에서는 어김없이 일련의 논쟁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이 구유에서 태어났을 때, 그것은 그분이 '노숙자(homeless)'였다는 뜻일까요? 예수님의 가족이 헤롯 왕의 베들레헴 유아 학살 명령을 피해 이집트로 도망쳤을 때, 그분은 '난민(refugee)'이었던 걸까요? 그리고 헤롯이 죽을 때까지 이집트에서 살았던 것은 그분이 '이민자(immigrant)'였다는 뜻일까요?
신자가 아니더라도 이 논쟁이 왜 중요한지는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메시아이자 삼위일체의 일원이며 천지의 창조주라고 믿는 분이 단순히 인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대 사회에서 사회적 지위가 낮은 인간이었으며, 지상에서 결코 어떠한 권력의 자리에도 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신자들에게 엄청난 함의를 갖습니다.
하지만 만약 예수님 탄생의 사실관계를 현대 세계의 현실과 억지로 분리해 낼 수 있다면, 당신은 그 의미를 밀어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고대의 건국 설화나 학문적 흥미의 대상 정도가 되어버립니다.
저는 예수님이 현대의 특정 법적, 문화적 범주에 들어맞는지 논쟁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제 의견을 말하자면, 저는 그분이 노숙자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그의 가족은 여행 중이었고, 집이 아예 없었다는 징후는 없습니다). 하지만 종교적 박해를 피해 도망쳤다는 점에서 공정한 정의를 내리자면 '난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같은 제국 내의 다른 지역으로 피신했기에 '이민자'라고 부르는 것은 다소 이상하긴 합니다.
하지만 제 결론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탄생의 핵심 진리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을 때, 극도의 겸손과 극도의 취약함이라는 태도로 세상에 들어오셨으며, 그 태도는 결코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은 하나님인 예수는 목수이자 떠돌이 설교자로 평생을 보냈습니다. 그는 너무나 취약해서 로마 제국에 의해 쉽게 처형당했고, 아주 소수의 추종자들만이 믿음을 붙들고 남았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기독교인이라 부르며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한다면, 우리 자신의 세속적 지위도 하찮게 여겨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타인을 그 끔찍한 나무에 못 박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의 예전 담임 목사님은 제 뇌리에 깊이 박힌 표현을 자주 쓰셨습니다. 바로 "거꾸로 된 하나님 나라(the upside-down kingdom of God)"입니다. 저도 이 표현을 항상 사용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왕이시지만, 세상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왕국의 왕이십니다. 그곳은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이웃을 섬기기 위해 희생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첫 순간부터 당신의 왕국이 가진 이 '거꾸로 된' 본질을 확립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 그리고 수많은 기독교인을 집어삼킨 권력에 대한 의지를 대조해 볼 때, 마하트마 간디가 했다고 전해지는 말이 떠오릅니다.
"나는 당신들의 그리스도는 좋아하지만,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당신들의 그리스도와 너무나 다릅니다."
공정한 비판입니다. 그 기준에 따르면 우리 중 누구도 실패를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중 누가 진정 그리스도와 같겠습니까?
하지만 간디의 비판에는 잠재적인 오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좀 더 그리스도처럼 행동한다면 사람들이 실제로 기독교인을 좋아할 것이라는 암묵적인 함의가 깔려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명백히 틀린 생각입니다. 사람들이 사랑과 연민을 받고 싶어 하고, 자신을 사랑하고 섬겨주는 기독교인을 만났을 때 그들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기독교인이 자신의 원수를 사랑하고 섬길 때, 그것을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이 그들의 정치적 십자군 운동에 동참하기를 거부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절대적으로 싫어합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는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걷지 못하는 자를 걷게 하고 맹인을 보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메시아라면 백성들을 정치적 승리로 이끌었어야 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자, 종교인들은 그를 내버렸습니다. 운명적인 선택 앞에 놓였을 때, 종교인들은 예수 대신 반란자였던 바라바(Barabbas)를 선택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가 로마의 환심을 산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속 당국은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적힌 조롱 섞인 팻말 아래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거꾸로 된 하나님 나라'에서 종교는 여전히 위험합니다. 하지만 그 위험의 방향이 뒤집혔습니다. 근본주의 신앙은 종교를 '타인'에게 위험한 것으로 만듭니다. 굴복시켜야 할 비신자들과 이단들에게 말이죠.
그러나 제대로 실천되는 기독교는 (그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에게 위험합니다. 미워하라고 지시받은 사람들을 미워하기를 거부하는 사람, 억압하고 정복하고 착취하라는 명령을—심지어 신의 이름으로 정복하라는 명령일지라도—거부하는 사람에게 기독교는 위험한 것입니다.
그 무대를 마련한 것은 그리스도의 겸손한 탄생이었습니다. 그것은 일련의 교훈 중 첫 번째였습니다. 타인을 억압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억압하는 것이고, 타인을 미워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것이며,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하고 혁명적인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교훈 말입니다.
#이교도, #배교, #원리주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