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웅의 퇴장과 한동훈을 둘러싼 한국정치의 언어 되새김질 해보기
[최보식의언론=서재원 객원논설위원]

영하 20도 혹한이 몰아치는 최전방에서 싸우는 병사들이 너무 추워서 인민군복을 껴입고 있는 걸 보자마자 동상방지 대책도 없으면서 ‘명예로운 군인정신’을 운운하며 인민군복을 벗기는가 하면, “애록고지’가 적군과 아군에 의하여 무수히 탈환과 상실을 반복하는 상황을 인지하고도 고지에 대공포를 설치하라는 황당한 명령을 내리던 유재호 중대장(조진웅 분).
결국 전술상 후퇴가 필수적인 상황에서도 중대원들을 몰살하게 만들 수 있는 위험을 그대로 묵살하고 진지를 사수하라는 무모한 명령을 내리자 부하인 김수혁 중위(고수 분)로부터 프래깅(Fragging, 상관살해)을 당한다.
한국 영화 ‘고지전’에서 조진웅이 연기한 인물의 죽음은 불편하다. 그는 적에게 쓰러지지 않는다. 영웅적으로 전사하지도 않는다. 그를 제거한 것은 전우였고, 그 방식은 우발적 총격이 아니라 계산된 ‘프레깅’이었다. 이 장면이 남기는 감정은 배신의 분노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질문이다. 이 전쟁은 이미 끝난 것이 아닌가.
프레깅은 흔히 내부 배신으로 오해되지만, 역사적으로는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체제를 지키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체제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음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베트남전에서 병사들이 상관을 제거한 이유는 권력 투쟁이 아니라, 명령이 더 이상 생존과 윤리를 동시에 담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레깅은 인간을 겨냥하지 않는다. 정당성을 겨냥한다.
이 점에서 조진웅의 퇴장은 단순한 캐릭터의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이 고지는 더 이상 고지가 아니다”라는 선언이다. 더 싸워서 얻을 것이 없고, 명령은 반복되지만 의미는 증발한 상태. 프레깅은 그 공허함을 폭로하는 가장 극단적인 언어다.
반면, 오늘날 한국 정치에서 반복되는 표현은 ‘내부총질’이다. 이 단어는 흥미롭다.
총은 쏘지만, 고지는 무너지지 않는다. 사람은 다치지만, 전쟁은 지속된다. 내부총질은 체제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체제 안에서 자기 위치를 재배치하려는 기술적 언어에 가깝다.
최근 회자되는 ‘한동훈 죽이기’라는 정치적 국면 역시 이 범주 안에 있다. 여기서 ‘죽이기’는 프레깅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제거가 아니라, 전쟁을 계속하기 위한 소모다. 상대를 제거함으로써 전쟁의 정당성을 묻는 대신, 전쟁의 무대를 연장한다.
프레깅이 발생하려면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이 싸움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합의다. 내부총질이 반복되는 정치에서는 이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싸움의 무의미함을 말하지만, 누구도 싸움의 중단을 선언하지 않는다. 대신 말의 날선 각도만 바꾼다.
조진웅의 캐릭터가 은퇴하듯 퇴장한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는 승진하지도, 복귀하지도 않는다. 그는 판을 바꾸지 않고, 판에서 내려간다. 이것은 패배가 아니라, 전쟁 언어로부터의 탈출이다. 프레깅의 세계관에서 은퇴는 비겁이 아니라 판단이다.
반대로 오늘의 정치에서 은퇴는 곧 패배로 해석된다. 판을 떠나는 순간, 당신은 사라진다. 그래서 모두가 남아 싸운다. 내부총질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때 정치의 언어는 군사적 은유를 차용하지만, 군사적 결단은 회피한다.
프레깅은 윤리적으로 위험한 단어다. 그러나 동시에 솔직한 단어다. 내부총질은 안전한 단어다. 하지만 거짓말에 가깝다. 전자는 “이 전쟁은 틀렸다”고 말하고, 후자는 “이 전쟁에서 누가 틀렸는지”만을 묻는다.
‘고지전’이 지금 다시 읽히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는 여전히 고지 위에 있지만, 왜 싸우는지는 잊은 상태다. 조진웅의 퇴장은 과거의 장면이 아니라, 현재의 질문이다.
이 싸움은 계속할 가치가 있는가.
그리고 더 불편한 질문 하나.
만약 없다면, 우리는 프레깅을 할 용기가 있는가 — 아니면 내부총질로 시간을 벌 뿐인가.
#고지전의은유 #프레깅과정치 #내부총질논쟁
삼성경제연구소 내 ‘대한민국상상력발전소’에서 컨텐츠 기획 및 강사 발굴 담당. 현재 삼성서울병원 경력개발지원센터 근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