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서방세계에서는 '초신호 전투(Battle of Chosin Reservoir)'로 표현하고 있다

[최보식의언론=전집현 작가]

"잘 알지도 못하고,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을 지켜달라는 부름에 응한 미국의 아들, 딸들을 기리며"

미국 워싱턴 D.C.의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 기념관(Korean War Veterans Memorial)’에는 장진호(長進湖)  전투에 참여한 미 제1해병사단 장병들의 모습이 조형되어 있다.

그 조형물 앞에는 "자유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글귀와 "잘 알지도 못하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을 지켜 달라는 부름에 응한 미국의 아들, 딸들을 기리며"라는 구절이 새겨진 기념비가 서 있다.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대 전투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 중의 하나로 꼽힌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3대 동계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9.15) 성공 후 연이어 서울을 탈환(9.28)하고, 평양을 점령(10.19)하며 북진하자, 김일성 정권은 산악지대인 평안북도 강계로 달아나 그곳을 임시수도로 정했다.

맥아더는 1950년 10월 26일, 미 제1해병사단을 원산에 상륙시킨다. 이 사단은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과달카날 전투를 승리를 이끌어 전쟁의 전기(轉機)를 마련한 부대이며, 인천상륙작전에도 참전했다.

맥아더는 미 제1해병사단으로 하여금 장진호를 거쳐 북한 임시수도인 강계로 진격하도록 하여, 평양을 거쳐 북진하는 미 8군과 합류해 남북을 통일한다는 작전계획을 갖고 있었다. 

한편, 중국은 김일성의 지원 요청에 따라 중국인민지원군을 창설해 북한군과 연합사령부를 구성했으며, 10월 19일 압록강을 넘고 10월 25일 국군과 첫 교전을 벌였다. 참전 인원은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미 제10군단 예하 미 해병 1사단은 함흥에서 장진군까지 국도를 따라 진격했다. 11월 11일에는 장진면 고토리에 이르렀고, 11월 14일에는 장진호 남단의 하갈우리에 도달해 사단사령부를 세우고 야간 활주로를 닦았다.

한편, 중공군은 11월 20일 무렵 장진호 지역에 9병단 소속 7개의 사단, 12만 명을 배치한 후, 미군이 장진호 일대에 깊숙히 들어오기만 기다렸다.

미 제1해병대가 장진호 서북쪽에 있는 유담리에 이른 11월 27일, 중공군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으로 그날 밤부터 장진호 일대의 미군을 에워싼 채 파상적인 공격을 가해 왔다.

이로 인해 유담리, 하갈우리, 고토리를 잇는 도로가 차단되면서 미군은 완전 고립 상태에 이르게 된다.

장진호 일대는 해발 1000~2000m 개마고원 고산 지대로, 장병들은 낮에는 영하 20도, 밤에는 영하 32도까지 떨어지는 살인적인 추위 속에 악전고투를 벌였다.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미군이 수세에 몰려 괴멸 우려까지 있자, 11월 30일 미 제10군단장은 장진호 부근의 모든 부대를 함흥∼흥남의 작전기지로 이동한다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미 1해병사단은 남쪽으로 이어지는 계곡을 통해 철수작전에 돌입해 12월 4일 사단사령부가 있는 하갈우리에 집결하였다. 영하 30도의 혹한과 중공군의 강력한 포위망을 뚫고 철수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 해병대는 하갈우리에서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있는 황초령을 넘어 흥남항이 있는 함흥까지 110㎞ 거리를 철수해야 했다. 장진호와 황초령을 연결하는 도로는 좁고 구불구불한데다 차가운 눈이 쌓여 얼어 붙었다. 

중공군은 미 해병 철수를 막기 위해 대규모 추가 병력을 투입했고, 미군 후퇴로에 있는 모든 다리를 폭파하고 장애물을 설치했다. 

미 해병이 끊어진 다리를 긴급 복구하는 데 필요한 자재를 흥남의 미군 공병창이 수송기로 긴급 공수했다. 이렇게 미 제1해병사단의 분전으로 12월 7일 고토리로 모든 병력을 집결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진흥리를 통과한 미 제1해병사단은 12월 11일 함흥지역에 모두 진입함으로써 장진호전투를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함흥의 흥남항에서 12월 14일부터 24일까지 유엔군 12만 명과 피난민 10만 명이 해상으로 무사히 철수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리는 흥남철수작전이다.

11월27일부터 12월11일까지 15일간의 장진호 전투기간 중 미 해병 1사단은 전투에서 700여 명의 전사자와 200여 명의 실종자, 3,500여 명의 부상자를 냈으며, 비전투 전사상자(대부분은 동상 환자) 6,200여 명으로 전 부대원의 80% 이상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할 정도였다.

물론 중공군 9병단의 피해는 더 컸으니 2만 5,000여 명의 전사자와 1만 3,000여 명의 부상자를 내고 사실상 와해됐다.

중공군은 서부전선은 물론 중동부 전선에서도 유엔군을 격파하고 단숨에 한반도를 석권하려고 했다. 

원래 중공군 9병단은 개마고원에 매복하고 있다가 미 1해병사단을 격파한 후 중동부전선에서 밀고 내려올 계획이었다. 당시 서부전선에선 중공군 13병단은 유엔군을 밀어내기 시작해 이듬해 1월 다시 서울을 중공군에 빼앗고 오산-제천-원주로 이어지는 북위37도선까지 진격한 상태였다.

그러나 중공군 9병단은 장진호 전투 피해로 병단의 전투력이 사실상 소진되어 제9병단 지휘부는 3개월에 걸쳐 부대를 재편성하기 위해 후방으로 철수하였다. 그 결과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점령했던 중공군 제3차 공세에 참가하지 못했다. 

만일 중공군의 계획대로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 9병단이 미군을 격파하고 중동부전선에서 쳐내려왔다면 서부전선에서의 패배만으로도 한반도 철수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유엔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장진호 전투'에 대해 정작 미국과 서방세계에서는 '초신호 전투(Battle of Chosin Reservoir)'로 표현하고 있다. 장진(長津)의 일본어 독음인 '초신(ちょうしん, chosin)'에서 유래한 표기법이었다. 

6·25 전쟁 당시 한국 지도나 군사작전 지도 대부분을 일본어로 작성된 지도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 등 유엔군은 '장진'이 아닌 '초신'으로 표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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