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가 원균의 무능과 비열함을 마음껏 떠벌리는 이른바 칠천량 사태

[최보식의언론=백승종 전 서강대 교수]

칠천량 해전은 1597년 임진왜란 당시 모함에 빠져 직위가 삭탈됐던 이순신을 대신했던 원균이 거제도 해상에서 일본군과 싸워 패했던 전투다. 원균은 일본군의 포위망을 벗어나려다 숨졌다. 이 해전으로 원균은 가장 우둔한 장수의 대명사로 낙인찍혔다. (편집자)  

후세는 칠천량 사태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원균을 마음껏 조롱하고 폄하했다. 워낙 이야기가 헝클어져 칠천량 사태의 진실을 알기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그런데 선조 34년 1월 중순에 우의정 이덕형이 선조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사태의 진실이 완전히 파묻힌 것은 아니었다. 이덕형으로 말하면, 원균의 후견인인 이산해의 사위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유성룡에 보다 더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는 칠천량에서 전사한 병사가 거의 없다는 점을 선조에게 보고하는 등 칠천량의 실상을 정확히 분석하기도 했다. 워낙 중요한 기록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이 지난해(선조 33년, 1600년)에 남쪽 지방을 왕래할 때 그 곳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았습니다만, 대개가 (원균, 이억기 및 최호 등은) 모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원균)는 과거에 경상우수사로 재임하였는데, 전쟁터에 나갈 때마다 병사들이 적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칼로 내리쳤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원균 수사(水使)는 미련하다'라고 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처리가 강직했습니다.

그 때문에 이순신을 체포한 후에 그를 (통제사로) 임명하여 보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위의 여러 장수가 모두 이순신의 막하(幕下)였으므로 서로 의논이 잘 되지 않았고, 원균의 세력은 고립되었습니다. 보다 못해 (부체찰사) 한효순(韓孝純)이 체찰사(體察使, 이원익)에게 보고하여 (조정에 인사) 조치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미처 그렇게 하지 못한 상태에서 원균이 패전한 것입니다."-조선왕조실록’, 선조 34년(1601) 1월 17일.

인용문에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원균은 강직하고 국가에 충성스러운 장수라는 점이다. 둘째, 통제사 원균의 주변에는 이순신의 직계 부하가 너무 많았고, 그들이 말을 잘 듣지 않아 리더십의 위기가 왔다는 사실이다. 셋째, 부체찰사 한효순이 그러한 문제점을 상부에 보고하여 인사조치를 취할 생각이었는데, 불행히도 곧 칠천량 사태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덕형은  이른바 칠천량 사태의 진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제장(여러 장수)들의 말은 믿을 수 없으나 (그때 참전한) 격군(格軍)의 말은 믿을 수 있습니다. 아군이 부산까지 가서 공격할 때 일입니다. 우리나라 함선 90척이 곧바로 적을 행해 돌진하자 수많은 적선이 바다를 가득 메우고 덤벼왔습니다. 그래서 수가 적은 우리 함대로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아군이 한산도를 향해 후퇴하였는데, 격군이 밤낮없이 노를 저어 (고성의) 춘원포(春原浦)에 닿았습니다. 적군은 밤을 이용하여 정면으로 공격해 왔고, 그 바람에 아군은 힘이 지친 데다 또 갑자기 당하는 변이라 싸움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치 물이 마르듯이 도망쳐 1명의 전사자도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실록’, 선조 34년(1601) 1월 17일.

후세가 원균의 무능과 비열함을 마음껏 떠벌리는 이른바 칠천량 사태란 사실 위와 같이 단순하고 허망한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그날의 패배가 어찌 전적으로 원균 한 사람의 탓이었겠는가 싶은데도 세상 사람들은 마음껏 그를 헐뜯으며 조롱한다. 

선조는 이덕형의 보고를 듣고 사태의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였다. 그는 도원수와 도체찰사와 비변사가 한 편이 되어 원균과 갈등할 때 원균을 저버렸다. 그런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았으므로, 나중에 원균을 '선무공신 제1등'으로 뽑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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