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성종 때 조선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최보식의언론=한정석 강호논객]

차클 플러스 캡처
차클 플러스 캡처

조선은 개국 초 훈구파에 의해 강력한 부국강병의 중앙집권체제를 표방하면서 고려 말의 잔재들을 청산하려 들었다.

이 때문에 정몽주와 길재의 후학들은 배척되어 낙향했고, 그런 가운데 김종직은 향촌에서 이데을로거 세력을 양성했다. 바로 사림(士林)들이었다. 사림은 그야말로 '딸깍발이'들이었다.

이들은 성리학 근본주의자들이어서 부국강병과 같은 것을 '패도정치'로 봤다.군사학과 기술학을 천시하였고 도덕과 의리를 숭상하면서, 학술과 언론을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를 희구했다.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보다는 향촌 자치제의 발달을 기대했다.

무리하게 비유해서 건국과 안보, 산업화를 일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훈구파'라면 여기에서 밀려난 진보는 '사림파'였다고 할 수 있다.

역사가 반복되는 이유는 사람들의 본성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 훈구파는 부국강병을 내세운 장기 집권 하에서 기득권화되었고 민중들과 거리가 벌어졌다.

시골에서 세력을 키워나갔던 사림들은 향약 등을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를 변형시켜 나가고 있었다. 소위 '민주화'를 위한 '브나로드' 기반 작업들을 해나갔던 것이다.

결국 성종 때 '조선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세조를 도와 많은 공을 세웠던 훈구 대신들이 권력과 재산을 모으자, 사림은 그들을 공격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조선 민주화 투쟁이었던 사화(士禍)가 시작됐다. 학통과 출신 지방이 서로 달랐고 학문적, 정치적 입장이 서로 달랐던 사림은 절의를 숭상하고 성리학의 정통적 계승자로 자부하면서, 훈구파의 부국강병 정책과 사장(詞章) 중심의 학풍을 비판하고, 유향소를 비롯한 향촌 자치제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조선의 당쟁은 격화됐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국리 민복보다는 사당(私黨)의 이익을 앞세우고, 이념보다는 학벌, 문벌, 지방 의식과 연결되어 국민을 분열시킴으로써 국가, 사회를 무너트리고 있었다.

결국 '조선 민주화'로 권력을 잡은 사림은 그들 역시 기득권화되어 분쟁에 분쟁을 거듭해 갔다. 조선은 실패 국가를 향해 더 이상 가망이 없는 나라로 치달아 갔다.

민주화운동 세력들과 사림은 놀라울 정도로 그 본성들이 같았다.

'나의 피는 증류수'라는 인식부터가 그랬다. 하지만 현실은 '강남 좌파'가 희망이었던 것. 

우리는 역사로부터 배울 수는 있어도, 같은 상황에서는 역시 같은 오류를 반복할 수 밖에 없다. 사람의 본성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민주화운동, #운동권, #사화, #사림,

저작권자 © 최보식의언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