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원의 삼류선비] 웬 분이 나무막대기를 담벼락에 곁에 심어 놓고 푯말에 써 붙이기를 “제발 자르지 마세요” 한다

 

능소화
능소화

살다 보면 기인(奇人)을 더러 만난다. 고르고 고른 평범한 세상의 극치인 공무원 세계에도 기인의 품성은 드러나는 법, 예전의 국방부 청사는 매우 넓은 공터를 자랑하여 자칫 캠퍼스 같았다.

전쟁기념관에서 바라본 청사 앞쪽에는 아름드리 벚꽃이 빙 둘러 울타리를 만들고, 대로변을 지나 청사 깊숙한 곳에는 미 8군과 경계면을 마주하고, 어마 무시한 철책선이 아니라 낡은 브로크 벽돌 위 녹슨 철조망만이 여기는 대한민국 땅, 저기는 미국 캘리포니아 땅의 경계를 가르고 있었다. 대한민국과 미국을 가르는 또 하나의 상징은 까만색의 전봇대와 야트막한 막사다.

어느 날 국방부 직원이라면 늘 하는 점심 산책으로 벚꽃길을 따라 걷는데 웬 분이 나무막대기를 담벼락에 곁에 심어 놓고 푯말에 써 붙이기를 제발 자르지 마세요한다. 울타리 청소는 국방부 청사를 지키는 헌병이 함으로 병사가 잡초를 제거할 때 이 나무를 베어 버릴까 봐 염려한 것이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봤다. 우리 동네(국방부)에서는 권 도사라고 알려진 사무관이다. 나는 웬 누런 막대기를 심어요?” 하니 윤 박사, 능소화야한다. 나는 그때도 박사로 통했고 지금은 공식 박사가 되었다.

내가 그때 왜 하늘과 같은 권 도사와 단짝이 되었느냐 하면 국방부를 저격하기 위해서였다.

첫째는 청사 어린이집을 짓겠다고 아름드리 왕 벚꽃을 베어버렸고, 둘째는 국전소 앞에 있는 몇 아름인지도 모를 느티나무를 말라 죽게 했으며, 마지막은 근지단 병영 막사를 짓겠다고 식민지 시대 일본 헌병 건물을 부숴버렸다. 나중에 하나 더 추가한 것이 연회장인가 뭔가를 짓겠다고 그 멋있는 사각형 박스 청사 건물의 위엄을 가렸기 때문이다. 그래, 무식하면 용감하다!

나는 그때 능소화라는 꽃을 처음 알았다. 인터넷이 빵빵하던 시절이 아니라서, 권 도사는 내게 그 특유의 맛깔스러운 말투에다 가끔 전라도식 사투리로 끝맺음하는 폼새가 그리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능소화는 임금을 그리워하다가 죽은 궁녀가 꽃이 되었고, 꽃이 되어도 임금을 그리워하며 궁궐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는 거여.”

그렇게 애지중지 키우고, 지키고, 가꾼 능소화는 내가 퇴직할 무렵 한 그루도 살아남지 못하고 베어버렸다. 무심한 헌병의 눈에는 그저 잡나무에 지나지 않은 지저분한 제거 대상의 1호였을 것이다. 그것도 한미 국경선을 가르며 기어 올라가는 나무이기에, 궁녀의 애틋함보다는 그들의 억센 임무가 더 중요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때부터 나는 권 도사가 내게 전해준 능소화를 찾아 여름철이면 어디든지 햇볕을 잔뜩 머금은 분홍빛에 짙은 붉은빛이 도는 이 꽃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서울 도심 길거리 가로수로에 잔뜩 피어난 꽃보다는 곧 죽어도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학봉 김성일 종택 기와 담장에 고스란히 내려앉은 능소화가 더 아름다운 것을 두말할 것도 없다. 박경리의 대화소설 토지에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꽃이 바로 능소화.

봄철 할아버지 산소에 핀 동백처럼 통 채로 떨어지는 이 꽃을 볼 때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지조를 지키려는 일편단심궁녀의 메타포가 어른거리는 것은 사실이며, 권 도사의 의도가 밈(meme)이 되어 또다시 다른 이에게도 전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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