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화하지만 가슴 속엔 깊은 슬픔 가진
커피보다는 와인 즐긴 와인 마니아
언젠가 와인 선물을 드렸더니
물방울 작품 한 점 선물로 받아

김창열 선생은 언제나 별 말이 없다. 희로애락의 표정도 거의 없다. 그냥 턱수염만 어루만질 뿐. 이러다 보니 필자도 쉽게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차갑기만 한 분은 아니다. 세상풍파를 모조리 겪고 난 뒤 어른으로서 온화함을 얼굴에 번지게 하려고 애를 쓴 도인 같다.
재래시장 같은 데서 미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을 붙잡고 화가 이름 세 사람을 말해 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카소, 이중섭, 물방울 순으로 말한다. 앞의 두 사람은 화가 이름을 기억하지만 김창열 화가의 경우 작가 이름은 대부분 알지 못한다. ‘물방울 화가’라고만 대답한다. 지명도면에서는 발군의 자리를 굳히고 있는 셈이다.
소위 일류화가들은 대부분 그렇듯이 김 선생의 작품을 받아오는 것도 무척이나 힘들고 더디다. 운이 좋아서 필자가 운영하는 부산의 화랑에서 서너 번의 초대전을 가진 것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부산이라는 장소의 특성 때문이리라.
언젠가 6.25 사변 중에 끔찍한 경험을 했던 김 선생의 얘기를 듣고 쇼크를 받은 적이 있다.
전란 중에 사람의 머리를 잘라 창끝에 매달아 서울역 앞을 휘젓고 다녔다는 회고담이었다. 물방울 그림을 볼 때 풀잎에 맺힌 영롱한 아침이슬을 연상하고만 있었는데 정작 작가의 가슴밑바닥에는 이런 지워지지 않는 아픔이 깔려 있었다니….
김 선생과 만날 때는 커피보다는 와인을 앞에 놓고 마주 앉은 적이 대부분일 정도로 그는 와인 애호가였다.
문화훈장을 받을 때였던가? 최고급 와인 한 병을 선물한 적이 있는데 그후 놀랍게도 1호 크기의 캔버스에 물방울 한 개를 그린 작품 한 점을 내게 건네주셨다. 30여년간을 왕래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이변이다. 의아해서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유럽에서는 와인 선물이 최고인데 내게 받은 와인은 대통령이나 총리 정도에게 하는 높은 급이어서 기분이 좋았다는 것이었다.

한번 초대전을 개최하게 되면 비용이 몇 천만원씩 깨어지는 판에 불과 100만원 안팎의 와인 한 병에 비록 1호짜리이긴 하지만 작품 한 점을 받은 것은 아직도 실감이 안 날 정도로 좀처럼 생기기 어려운 일이다.
한편 그림 시장에서의 물방울 작품가격은 긴 세월 동안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
수년 전 갑자기 ‘단색화’라는 특정 장르의 작품가격들이 들썩이기 시작했을 때 다들 잠깐 그러다가 멈추겠지 했지만, 오늘날까지 상승일로에 있다. 그 기간에도 이우환, 김창열의 가격은 별반 변화가 없었다. 박서보를 비롯한 정상화, 윤형근, 정창섭, 하종현 등 일련의 작가들만 늘 북적거렸다. 그러던 중 이들 단색화 작품들의 가격이 잠깐 멈칫할 즈음에 이번엔 이우환의 가격이 파죽지세로 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이즈음에도 물방울 작품의 가격은 제자리걸음이었다.
최근 오랜 투병 끝에 작가가 세상을 떠나자 이윽고 작품값이 치솟기 시작했다. 작고한 작가라 해서 반드시 가격이 오르는 것도 아닌 법인데도 말이다.
필자도 오르기 직전까지 오랜 기간 소장하고 있던 물방울 작품들을 90% 이상 처분했는데, 곧바로 가격이 4배 이상 수직으로 상승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명색이 작품가격에 가장 민감해야 할 화상의 처지에서도 미처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 급변하는 오늘날의 미술품 가격 체계인 것 같다. 47년, 반백 년 가까이 화상을 하고 있는 처지인데도 눈 뜬 장님 신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