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는 계산인데…자랑으로 끝난 '백악관 미팅 20분' 참사
[최보식의언론=박주현 객원논설위원]

김민석 총리가 13일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20분간 만났다고 언론매체에 알린 다음날, 트럼프는 한국에 호르무즈 해협에 군함 파견을 요구했다. (편집자)
몇 년 전인가 큰 계약을 눈앞에서 날려먹고 소주잔을 들이켜며 신세 한탄을 하는 후배 녀석을 만났었다. 변명을 들어보니 자기가 얼마나 이 계약을 간절히 원하는지, 이 계약이 성사되면 자기 회사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상대방에게 한 시간 내내 열변을 토했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식어버린 계란말이를 씹으며 아주 차갑게 한마디 해줬다. 사업의 내용을 잘은 몰라도, 협상 테이블에선 네가 뭘 원하는지가 아니라, 상대에게 어떤 이익을 쥐여줄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게 협상의 기본아니냐고.
갑자기 이 어설픈 후배가 떠오르는 이유는, 며칠 전 태평양 건너편 백악관에서 벌어진 어느 고위급 인사의 기막힌 '외교 코미디'가 자연스럽게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 이야기면 팝콘이나 씹으며 웃어넘기겠는데, 불행히도 그 아마추어가 우리나라 국무총리라는 사실이 씁쓸할 따름이다.
상황을 한번 복기해 보자. 백악관의 그분은 지금 몹시 짜증이 나있는 상태다. 이란이 사방팔방 반격 미사일을 쏘며 중동을 불바다로 만들고 있고, 이 전쟁을 빨리 마무리 짓지 않으면 자기 지지율과 경제 성적표가 박살날 위기다.
그런데 한국의 넘버원은 자기 코가 석 자라 대화가 안 통하고, 넘버 투라는 총리가 찾아왔다. 아마 트럼프는 그의 전력이나 성향에 대해 사전에 짧게나마 브리핑을 받았을 테고, 아마 속는 셈치고 찔러나 보자는 심산이었을 거다.
협상의 달인인 그는 아주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툭 던졌다.
"북한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자, 여기서 정상적인 지능을 가진 국가의 2인자라면 어떻게 답해야 했을까.
"대통령님, 지금 북한 신경 쓰실 때가 아닙니다. 이란전 때문에 골치 아프신 거 다 압니다. 우리 국내 여론상 당장 파병은 어렵지만, 우회적으로 포탄이나 군수 물자 보급은 확실하게 밀어드리겠습니다. 대신 우리도 챙길 건 챙겨야겠습니다. 우리 기업들 관세 다시 한번 고려해 주시고, 환율 방어하게 달러 스와프 도 좀 고려해 주십시오. 전쟁 끝나면 이란 재건 사업에 한국 기업들 지분 확실하게 챙겨주십시오."
이게 정답이다. 상대의 가장 가려운 곳을 긁어주면서 우리가 원하는 거대한 실리를 뜯어내는 것. 트럼프가 바랐던 대답도 바로 이런 철저한 '기브 앤 테이크였'을 거다.
그런데 신문 내용을 보면 우리의 총리께서는 북한 미끼를 덥석 물고 엉뚱한 다큐멘터리를 찍기 시작했다.
북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그의 머릿속엔 백악관이 아니라 여의도 정치판이 그려졌을 거다. 아, 여기서 내가 미국 대통령을 설득해 대북 제재를 풀고 평화 무드를 조성하면, 우리 당내 그 잘난 NL 운동권 선후배들 사이에서 내가 영웅이 되겠구나. 차기 대권 주자 자리가 내 것이 되겠구나.
그는 필시 눈을 반짝이며 북한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선제적인 제재 해제와 대화가 필요하다는 둥, 그 철지난 80년대 학생회장 시절의 낭만적인 연설을 장황하게 늘어놓았을 것이다.
결과는 어땠나. 20분 컷.
통역 시간 빼고, 인사하고 사진 찍는 시간 빼면 사실상 5분도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버린 거다. 산전수전 다 겪은 협상가의 눈에, 거래할 물건은 하나도 안 가져오고 남의 귀한 시간 뺏어가며 자기 이념 장사나 하려는 이 순진한 아마추어가 얼마나 하찮고 피곤해 보였겠는가.
진짜 비극은 이 촌극의 주인공이 자신이 낚인 줄도, 쫓겨난 줄도 모른 채 태평양을 건너와 동네방네 자랑질을 하고 다닌다는 점이다. 미국 대통령이 내 대북 비전에 귀를 기울였다며 환하게 웃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구청장 자리도 버거워 보이는 인물을 굳이 2인자로 앉힌 이 정권의 얄팍한 잔꾀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따지고 보면 이건 총리 개인의 멍청함이 아니라, 권력자의 사사로운 불안이 빚어낸 구조적 참사다. 당내 파워 게임에서 정청래 같은 강성 스피커들의 입을 다물게 하고, 자신의 사법 리스크를 방어하기 위해 배추장사에 재주가 더 많아보이는 허우대만 멀쩡한 서울대 운동권 출신, 이미 애저녁에 밑천 다 들어난 힘 빠진 인물을 방패막이로 내세운 결과다. 국내 정치용으로 세팅된 허수아비를 냉혹한 국제 외교의 최전선에 밀어 넣었으니, 부끄러움은 언제나 그렇듯 그게 뻔히 보이는 사람의 몫이다.
예전 만났던 내 후배는 적어도 술 깨고 나서는 자기 잘못을 부끄러워할 줄은 알았다. 그런데 국가의 운명을 짊어지고 나간 저 텅 빈 머리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세계 최강대국의 수장 앞에서 얼마나 한심한 취급을 당했는지 짐작조차 못 하고 있다.
머릿속 절반 이상이 아직도 위대한 북녘 동포 걱정으로 가득 찬 시대착오적 이념가들이 나라의 핸들을 잡고 있는 한, 우리는 앞으로도 숱하게 20분 만에 쫓겨나는 수모를 겪어야 할 것이다. 외교는 감성팔이 발표회가 아니라, 피 튀기는 계산기 싸움이라는 걸 영원히 모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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