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대군을 변호하며

[최보식의언론=김은희 문화인류학 박사]

영화 왕과 사는 남자로 단종은 재평가되고 있는 반면, 세조는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세조(1417~1468, 재위 1455~1468)는 왕권과 국방을 강화하고 국정운영의 기본 원칙이 되는 통일적인 법전(조선경국대전 발간) 체재를 확립했다는 평가가 있다. (편집자) 

한국사회의 대중적 역사 담론에서 수양대군 혹은 세조는 나이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잔인한 왕으로 각인되어 있다. 탐욕스런 삼촌에게 왕의 자리를 뺏기고 죽임을 당한 단종의 애통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영화 ‘관상’에서도 수양대군은 '역모를 꾸미는' 역적의 관상을 가진 아주 흉악하고 패륜을 행하는 인간으로 묘사된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사육신은 죽음을 무릅쓰고 불의에 저항한 의로운 선비로 역사 이야기에 그려지며 수양대군의 왕위계승을 도운 정인지나 신숙주 등은 임금에 대한 의리와 충절을 버리고 권력에 아부한 만고의 간신으로 회자된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을 조선시대 초기(1400년대)의 문화적 맥락 속에서 살펴볼 때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과도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인식은 유교의 종법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종법제는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친족/가족 집단을 대종과 소종으로 구분하고 통합하는 제도이다. 종법제에 따르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장자, 보다 정확히 말해서 본처의 맏아들 즉 적장자가 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집안의 대를 이어간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대를 잇지 못하기 때문에 결혼 후 분가해 나가 자신의 집안을 세운다. 적장자가 죽을 경우 적장자의 적장자, 즉 장손이 아버지  제사를 물려받고 대를 이어 간다. 작은 아들은 혈연적으로 아버지의 친아들이지만 아버지의 제사를 죽은 형한테서 물려받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큰아들의 사후에는 혈연적으로 더 가까운 작은 아들이 아니라 장손이 할아버지 제사를 주관하는 제주가 된다. 세대가 지나면서 시조의 적장자로 이어지는 집을 대종(큰집)이라 하고 대종의 작은 아들에 의해 형성된 집을 소종이라 한다. 

대종과 소종을 일상생활에서는 흔히 대소가라고 하는데 보통 고조할아버지의 자손들이 이룬 큰집과 작은집 들을 말한다. 당내친이라 불리는 이들 고조할아버지의 남계 후손들은 대종가에 모여 고조할아버지의 제사를 함께 지내면서 하나의 부계 친족집단으로 통합된다. 

종법제는 중국의 주나라에 있었던 제도였지만 정작 중국에서는 소멸해버린 제도였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이 종법제를 확립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하였다. 하지만 고려가 망한 지 거의 200년 이상 지난 17세기에 들어와서야 양반계층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종법제에 근거한 장자계승의 원칙은 조선시대 초기라고 할 수 있는 1400년대에는 왕실에서도 민간에서도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문종이 왕위에 오른지 2년 만에 병으로 승하하고 12살(만11살) 단종이 왕위에 오른 게 1452년이다. 고려가 1392년에 망한지 60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 60년은 문화가 획기적으로 바뀌기에는 짧은 기간이다. 

1400년대에는 맏아들과 맏아들의 맏아들이 집안의 대를 이어간다는 생각은 희미해서 사대부 계층에서도 제사를 아들딸 구분없이 돌아가면서 지냈다(이를 '윤회봉사'라 한다).  

즉 맏아들에서 맏아들로 영속적으로 대를 이어가게 되는 집안으로서의 '가'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종가나 종손의 개념도 확립되지 않았다. 재산도 아들, 딸에게 똑같이 나누어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조선 초기 유학자들에게는 '딸도 똑같은 자식'이었다. 부계적으로 영원히 대를 이어가는 집안의 개념이 없었으니 딸이 결혼하면 남의 집 사람이 된다는 생각도 없었다. 실제로 '남귀여가'라 하여 사위가 처가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자식 낳아 키우는 것이 흔했다. 그래서 외손이 남의 집 자손이라는 생각도 없었다. 

15세기에 간행된 가계기록은 조선시대 후기의 족보와 달리 외손들도 똑같이 후손으로 기재하였다. 조상을 추적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의 아버지 이런 식으로 부계 조상만 조상으로 인식한 게 아니라 양쪽 부모의 양쪽 부모들을 다 훑어 올라갔다. 

윗대로 올라갈수록 조상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지니까 통상적인 가계기록은 팔고조의 선에서 끊었다. 아무개의 몇 대 손이라는 개념은 존재하기 어려웠다.

문종이 12살짜리 세자를 두고 눈을 감았을 때 당시 가족의 개념에 따르면 왕의 형제들도 왕위를 계승할 명분이 충분히 있었다고 보인다. 더구나 문종은 재위 2년 만에 승하하였다. 

세자였던 문종의 아들 홍위가 왕위에 오르지만 이제 만 11살로 왕국을 통치할 수 없는 어린 나이였다. 그의 친어머니가 그를 낳고 곧 죽었기에 수렴청정할 대비도 대왕대비도 없는 상황이었다.  

수양대군은 문종보다 3살 밖에 어리지 않았으며 문종이 승하했을 때 36살로 군왕의 나이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세종의 자식들 중에서 가장 어른이며 능력과 자질 면에 있어서도 호방하고 문과 무에 모두 뛰어났다.  

수양대군이야말로 나이 어린 단종을 대신하여 섭정할 자격과 능력이 갖추어진 왕실의 어른이었다. 사실 문종이 너무 짧은 기간 왕으로 있었기에 선왕이었던 세종의 지위를 11살짜리 어린 장손이 물려받느냐 아니면 똑똑하고 유능한 둘째 아들이 물려받느냐의 이슈였다고도 볼 수 있다. 

평균 수명이 짧았던 전근대사회에서 세자가 성인이 되기 전에 왕이 승하하거나 나이 어린 자식을 두고 아버지가 일찍 죽는 일은 종종 일어난다.  이런 경우 망자의 형제가 사회적 지위를 계승하는 형제 상속은 아프리카 부계 사회, 중동의 이슬람 사회, 동북아시아의 다양한 민족 집단 등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고구려에는 '형사취수'의 관습이 있었다. 즉 형이 죽으면 형의 아내를 동생이 취하는 관습인데 형의 지위를 그대로 계승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라시대나 고려 시대에 형제가 왕위를 계승한 사례는 심심치 않게 있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훈요십조에서 세자가 너무 어려 국정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때 형제가 왕위를 계승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사실 나이 어린 왕이 등극할 경우 국가의 안위와 질서는 위태해진다. 누가 권력을 행사할 것인가? 어린 왕은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왕국을 통치해야 한다. 실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피튀는 투쟁이 이어질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왕의 자식이 어릴 경우 형제가 왕위를 계승하도록 한 것은 왕권을 안정시키고 국가를 보위하기 위한 현실적 방법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와 황보인, 그리고 그들과 한 편이 되었던 안평대군 일파를 무참히 죽였던 계유정난, 단종의 양위와 세조의 왕위계승, 사육신의 단종복위 음모 그리고 단종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는 나에게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가를 규정하기 애매한 권력 투쟁으로 보인다.  

실제 왕좌는 비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권력을 탐하는 세력들이 힘과 지략으로 결투하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세종으로부터 단종을 보위해달라는 고명을 받았다는 김종서와 황보인은 나이 어린 단종을 대신하여 인사권 등을 휘둘렀고 이들의 전횡은 수양대군의 반발을 샀으며 성삼문 등의 사육신들도 경계하였다.  

그리고 신진사대부였던 사육신의 입장에서는 나이 어린 왕은 오히려 전제적 왕권을 제압하고 덕망 높은 유학자들에 의한 성리학적 왕도정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었다.  그러나 유교적 종법제가 실생활에서 거의 수용되지 않았던 시대에 왕권이 하루속히 안정되길 바라고  국가 안위를 걱정하는 입장에서는 강력한 리더십을 갖고 있었던 수양대군의 왕위 계승을 지지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 초기부터 왕위 계승에 있어 종법제는 무시되었다. 태종은 세자였던 양녕군을 폐하고 자질이 뛰어난 셋째 아들 세종을 세자로 봉했다.  

세조는 자신의 후계자를 정하는 데 있어 유교의 종법제를 무시하였다. 일찍 죽은 의경세자의 두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 어린 장손 대신 작은 아들(예종)을 세자로 봉하여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예종이 15개월 만에 병사하자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는 만 네 살이었던 예종의 아들 제안군을 제쳐놓고 제안군의 사촌인 자을산군(성종), 즉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을 만 12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세조의 장손이라고 할 수 있는 성종의 형 월산군은 배제되었다. 여기서 세조와 정희왕후는 적장자 계승의 원칙을 절대적으로 따라야 할 도덕적 원칙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으며 대신 개인의 자질이나 연령 등 다른 요소들도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았을까 추측하게 된다. 

수양대군의 왕위계승에 승복하지 않은 사육신은 세조와 의경세자를 살해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는 거사를 계획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사실 단종을 죽게 만든 것은 이들의 무모한 단종복위음모가 아니었을까? 사육신은 거의 200년 이상이 지난 숙종대에 복권이 되었다. 200년이 지나는 동안 유림은 향촌사회에서 향권을 장악하였고 이에 따라 유교적 종법제에 근거한 한국의 '전통가족'이 확립된다. 

이 과정에서 먼 과거의 문화는 잊혀져 가고 형의 왕위를 계승한 수양대군은 큰집의 종손의 위치를 빼앗은 불의의 탐욕스러운 삼촌으로 격하된다. 동시에 사육신은 조선이 망한 후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의로운 지식인의 사표로 추앙받아 오고 있다. 

그러나 역사 연구의 목적이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최대한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데 있다면 이제 연구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문화적 가치관을 잠시 던져버리고 연구 대상이 되는 시대의 문화적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영화 '관상'의 수양대군(왼쪽), 세조 어진(오른쪽)
영화 '관상'의 수양대군(왼쪽), 세조 어진(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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