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부터 한국 정치에서 ‘옳고 그름’은 사라졌다. 오직 ‘우리 편을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는 조폭적 의리만 남았다
[최보식의언론=박주현 재담 엔터테인먼트 대표, 김선래 기자]

나는 한때 꽤 괜찮다고 여겼던 한국의 민주주의의 성숙도가 왜 이토록 처참하게 후퇴했는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불편한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가 성장하지 못한 건, 과거를 부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여전히 많은 국민이 ‘가장 호감 가는 대통령’으로 꼽는 노무현 전 대통령, 그가 남긴 유산을 냉정하게 끊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와 입지전적인 이력이 주는 울림을 나도 안다. 내가 중도나 보수 그 어디쯤으로 넘어올 때, 감정적으로 가장 떨치기 힘든 사람도 그였다. 하지만 나는 내 판단을 바꿀 생각이 없다. 냉정히 말해 한국 정치를 ‘보복의 경연장’으로 만든 기원(起源)은 그의 죽음에 있다.
나는 그의 죽음이 너무나 무책임했다고 생각한다.
전직 대통령은 사인이 아니다. 역사의 평가와 법의 심판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할 의무가 있는 공인 중의 공인이다. 그가 정말 억울했다면 법정에서 그 억울함을 다퉜어야 했다. 잘못한 게 있었다면, “내가 잘못했다”고 국민 앞에 고개를 숙이고 죗값을 치르는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다. 그것이 민주주의 지도자의 마지막 책임이다.
하지만 그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그 모든 절차를 증발시켰다.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이성의 영역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감정의 영역으로 강제 이동시켰다. 그 순간부터 한국 정치에서 ‘옳고 그름’은 사라졌다. 오직 ‘우리 편을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는 조폭적 의리만 남았다.
그의 죽음 이후 정치는 이성이 아닌 ‘한(恨)’이 지배했다. 문재인 정권 내내 몰아쳤던 적폐 청산은 사법 정의가 아니라, “노무현을 죽인 저들에게 복수하겠다”는 굿판이었다. 진영 논리는 단순한 의견 차이를 넘어, 상종 못 할 원수들을 죽이기 위한 전쟁으로 변질됐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민주당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과오가 드러날 때마다 노무현을 소환한다. 그를 자신의 치부를 가리는 ‘도덕적 기저귀’로 삼는다. “검찰이 노무현을 죽이더니 이제는 이재명을 죽이려 한다”는 프레임. 이 광기 어린 선동의 뿌리는 결국 노무현이 스스로 만든 것이다.
그의 비겁함은 죽음 이전에도 있었다. 한미 FTA가 대표적이다. 그는 FTA가 국익에 필요하다는 걸 알았고, 협상의 모든 그림을 그려 놓았다. 하지만 지지층의 반발이 두려워 최종 체결의 도장은 찍지 않고 다음 정권인 이명박 정부로 떠넘겼다. 욕먹을 짓은 남에게 미루고, 자신은 뒤로 빠지는 태도. 그 회피의 본능이 최후의 순간에도 작동한 것은 아닐까.
그를 신화의 영역에서 끌어내려 현실의 영역으로 복귀시키지 않는 한, 한국 정치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그는 광기의 진영 논리를 만든 장본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죽음으로 책임을 회피한 지도자를 성인(聖人)으로 추앙하는 사회에서, 살아있는 자들의 책임 정치가 설 자리는 없다. 이제는 그를 놓아줘야 한다. 아니, 부정해야 한다.
그가 떠난 후 한국 정치는 거대한 육아실이 되버렸다. 정치인들이 미성숙해서가 아니다. 유권자인 국민이 스스로 ‘유아기적 분리불안’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눈앞에 없으면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처럼, 한국의 유권자는 자신이 맹목적으로 의지하고 추종할 대상을 찾지 못하면 불안해하는 존재가 되버렸다. ‘개딸’이라 불리는 이재명 대표의 강성 지지층을 보자. 그들은 이재명을 대리인으로 보지 않는다. 지켜줘야 할 ‘아빠’나 나를 구원해 줄 ‘메시아’로 여긴다. 이성적 판단 회로는 꺼지고 종교적 신념만 남는다.
문제는 그들을 경멸한다는 중도나 우파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그들 역시 이재명이 싫다면서, 그 대척점에서 자신을 이끌어줄 또 다른 ‘강력한 지도자’를 갈구한다.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이 지독한 의존성. 이것이야말로 한국 정치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쳇바퀴를 도는 근본 원인이다.
냉정해지자. 정치는 종교가 아니다. ‘서비스업’이다.
식당 주인이 밥을 맛없게 지으면 식당을 옮기면 그만이다. 주인에게 “나를 구원해 주소서”라고 기도하거나, 맛없는 밥을 먹으면서 “우리 사장님 불쌍해서 어쩌나” 하고 우는 손님은 없다. 그런데 유독 정치라는 서비스 앞에서는 소비자가 을(乙)을 자처하며 공급자를 숭배한다.
대다수 국민은 여의도에 있는 그 어떤 정치인보다 훨씬 더 치열하고, 성실하고, 도덕적으로 산다. 당신들은 세금을 내고, 가족을 부양하고, 법을 지키며 하루를 버텨 낸다. 그런데 왜 당신들은 1980년대 잠시 거리에 나갔던 그 짧은 기억 하나를 훈장 삼아 평생 부와 권력을 누리는 자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는가. 그들이 당신보다 우월한 것이라곤 ‘뻔뻔함’밖에 없다.
이런 맹목적 추종은 정치인의 성장또한 가로막는다. 팬덤 뒤에 숨으면 과오가 덮이고 무능이 포장되는데, 누가 굳이 실력을 키우고 성찰을 하겠나.
성장이란 무엇인가. 과거를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이 틀릴 수도 있음을 깨닫고, 껍질을 깨고 나오는 고통이 성장이다. 하지만 한국 정치는 과거를 부정하지 못한다. 오히려 과거의 망령을 신주단지처럼 모신다.
좌든 우든 정치인들은 겉으로야 어떻든 내심 ‘노무현’을 꿈꾼다. 비극적으로 산화하여 지지자들의 영원한 부채의식 속에 사는 ‘성인(聖人)’. 아무도 감히 그를 비판하지 않는다.
정치 평론가나 유튜버들 또한 입으로는 김어준을 욕하면서, 속으로는 ‘김어준’을 꿈꾼다. 사실 관계는 무시하고 자극적인 선동으로 거대 팬덤을 거느리는 그 ‘교주’의 지위.
정치가 서비스가 되려면, 국민이 먼저 까다로운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 왕을 모시는 백성이 아니라, 직원을 부리는 사장의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분리불안을 떨쳐내고 “너 아니어도 일할 사람은 많다”고 차갑게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정치는 정상화된다. 그들을 숭배하기엔 당신은 너무나 아까운 존재다.
박주현 재담 엔터테인먼트 대표 Muzlan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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