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외교를 지양하고 계산의 외교를 시도

[최보식의언론=김정기 세계스마트시티기구(WEGO) 사무총장(전 동국대 경영전문대학원 석좌교수, 전 상하이 총영사)]

KBS 뉴스 캡처
KBS 뉴스 캡처

외교는 성과보다 방식에서 먼저 정체를 드러낸다. 사진은 하루를 남기지만, 구조는 위기를 견딘다.

이재명 대통령의 이번 방일, 특히 일본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와의 나라현(奈良) 정상회담 역시 이 기준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문제는 단순하다. 이번 만남이 구조를 만들었는가, 아니면 구조를 만들겠다는 의도만 보여주었는가다.

'한국형 협상의 법칙(The Art of K-Negotiation )' 저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협상은 설득이 아니라 비용과 선택지를 재배치하는 기술이다. 진정한 협상력은 상대를 감동시키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결렬되어도 감당 가능한 대안, 즉 스스로의 지렛대를 얼마나 확보했는가에서 나온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이번 방일은 분명 감정적 외교를 벗어나려는 시도를 보여주었지만, 아직 협상의 주도권을 장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장소 선택부터 그렇다. 나라현은 일본 정치의 중심도, 실질적 권력이 집중된 공간도 아니다. 다카이치 총리가 자신의 고향으로 한국 대통령을 초청한 것은 상징적으로는 파격이지만, 동시에 결단과 비용이 요구되는 협상으로부터 한 발 물러난 선택이기도 하다.

협상에서 장소는 프레임을 만든다. 그러나 프레임이 부드러울수록, 구속력은 약해진다. 이번 회담은 갈등을 완화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일본을 실질적 선택의 기로로 몰아넣지는 못했다.

과거사 접근 역시 비슷하다.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 희생자 유해의 DNA 감정 추진 합의는 인도적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 정당성(Legitimacy)을 갖춘 절차라는 점도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보수적 시각에서 보면, 이 조치가 다른 과거사 쟁점으로 확장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을 확보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구조란 선례 하나로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잘못된 선례는 향후 협상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안보와 경제를 잇는 실무 협력도 마찬가지다. 한·일 경찰청 간 초국가 범죄 공조 제도화, 청년 기술자격 상호인정 확대는 협상의 단위를 키운 패키지화 전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패키지가 한국의 전략적 이익을 명확히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는지, 아니면 상호 호혜라는 명분 속에서 균형을 흐린 것은 아닌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패키지는 강자가 설계할 때 유리하다. 주도권 없는 패키지는 양보의 다른 이름이 될 수도 있다.

트럼프 집권 2년 차라는 변수 앞에서 이 한계는 더 분명해진다. 트럼프는 외교를 가치가 아니라 숫자로 본다. 방위비 분담, 주한미군, 동맹의 효율성은 모두 그의 계산표 위에 있다.

한국과 일본이 공조하지 않으면 불리하다는 진단은 옳다. 그러나 이번 회담이 과연 미국을 상대로 한 공동 앵커링(Anchoring)을 실제로 설정했는지, 아니면 내부 결속을 다지는 데 그쳤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앵커링은 선언이 아니라 제안서로 작동할 때 의미를 갖는다.

중국과 러시아를 향한 절제된 언어 역시 양면성을 지닌다. 자유항행, 국제법, 공급망 안정이라는 표현은 외교적 안전장치이지만, 동시에 전략적 모호성으로 읽힐 위험도 안고 있다. 

보수 외교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를 자극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가 '레드 라인' 인지를 분명히 하는 일이다. 절제는 전략일 수 있으나, 반복되면 회피로 인식될 수 있다.

북한 문제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드러난다. 도발에는 비용, 자제에는 관리라는 조건부 접근은 이론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그 전제는 한국 스스로의 최선의 대안(BATNA)이 충분히 강할 때만 성립한다. 이번 방일을 통해 한·미·일 공조는 확인됐지만, 한국이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선택지가 실질적으로 강화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결국 이번 방일의 평가는 이행의 문제로 귀결된다. 협상은 합의보다 이행에서 실패한다. 구조는 선언이 아니라 문서화(Documentation), 그리고 상대가 체감하는 비용 변화를 통해서만 완성된다.

이번 정상회담은 감정의 외교를 지양하고 계산의 외교를 시도했다는 점에서는 진전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구조를 장악한 협상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외교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협상은 의도가 아니다. 구조를 실제로 작동시킬 수 있을 때만, 정상회담은 역사로 남는다. 나라에서 열린 이번 회담은 성과라기보다, 이재명 외교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시험지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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