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치소의 빛, 지게꾼의 눈물, 목사의 기도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구치소 접견실 벽 위의 구멍에서 햇빛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의 불빛이 조금씩 더 밝아지는 것 같았다. 조진도가 씁쓸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청송에서는 벌써 내가 내려온다고 독방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어요. 이 자식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였는데 내려오면 보자 이거죠. 그래서 저도 아예 10년 징역 다시 살 각오를 하고 준비를 하고 있어요. 밤에 시멘트 바닥에서 그냥 자는 단련을 하고 있어요."

"제가 변호사로서 무능해서 이렇게 됐습니다. 미안해요."

내가 사과했다.

"에이, 무슨 그런 소심한 말씀을 하세요. 재판장은 진실을 볼 능력이 없는 사람 같더라구요. 전 마음속으로 재판장에게 '마지막 하루까지 다 살아줄게, 임마' 하고 소리쳤어요. 사실 전 석방되기만 하면 나가는 날부터 쓰레기라도 주우면서 살아가고 싶었어요. 뭘 하든 세상은 너무 아름다우니까요."

가슴이 찡했다.

"제가 12살 때 저를 아주 귀여워해주던 지게꾼 아저씨가 있었어요. 그 아저씨는 하루 종일 손님을 기다리면서 서 있었죠. 자연히 저랑 자주 봤는데 월남한 외로운 분이라 저를 아들같이 예뻐해 줬어요. 

어느 날 제가 술을 먹고 얼굴이 벌개 진 채로 담배를 꼬나물고 있다가 그 아저씨한테 얻어맞았어요. 뭐가 되려고 어린놈이 벌써부터 이 꼴이냐는 거죠. 그 아저씨는 눈물까지 글썽거렸어요. 내가 속으로 반성했죠. 그 다음부터 전 술담배는 아예 입에 대지 않았어요. 그 다음 부턴 그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그가 잠시 쉬었다가 얘기를 계속했다.

"건달이 될 수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제가 자랄 때만 해도 건달들은 사실 춥고 배고팠어요. 지금처럼 이권이 있는 것도 아니구요. 차라리 구걸하면서 틈틈이 도둑질하는 게 먹고살기는 편했죠. 배운 게 있습니까? 기술이 있습니까?"

그의 도둑질은 도덕과 양심 이전의 생존문제였다.

"3월 24일은 제가 꼭 15년 만에 청송교도소 문을 나선 날이었죠. 버스를 하도 오랜만에 타보니까 멀미가 나서 계속 토했어요. 속이 조금 진정된 후에야 바깥 경치가 눈에 들어왔죠. 길가에는 온통 음식점과 술집, 모텔들이 늘어서 있더라구요. 그러다가 시골 교회의 조그만 십자가가 보였어요. 험난한 세상에 그래도 아직 소금과 빛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서울구치소 감방은 그래도 햇볕이 펼쳐져 있더라구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하나님이 주신 그 한 조각의 빛이 그렇게 감사한 건지 몰랐어요. 청송에서는 철판으로 창에 댔었죠."

"믿음이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청송에 근무하시던 박효진 교도관님이 저에게 전도하려고 무척 노력했죠. 그때마다 저는 그 분을 조롱했죠. 하나님이 있으면 저 같은 놈이 생기게 했겠어요? 그런데 하루는 제가 혁수정에 묶여 어둠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데 박 교도관님이 밤에 몰래 찾아왔죠. 박 교도관님은 감방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식구 통 속으로 손을 넣어 내 손을 잡고 울며 기도하는 거예요. 제가 하나님을 알게 된 건 바로 그분 덕입니다."

날이 저물었다. 형광등이 환하게 비쳤다. 밖에서 근무하는 교도관이 시계를 쳐다보면서 하품을 하고 있었다.

"참, 변호사님."

조진도가 나를 불렀다.

"왜요?"

내가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믿음이 있다면 교도소 안에 있는 것과 밖에 있는 것에 대해 차이가 없어야 하지 않을까요. 진정 영혼이 자유롭다면 그까짓 담 하나 사이로 차이를 느끼지 말아야 하는 거죠."

그가 내게 두 번째 던져준 화두였다.

"조진도 씨가 본 세상은 어떻습니까?"

내가 물었다.

"그래도 세상은 아름답죠."

가슴이 뭉클했다.

교도소 문을 나선 나는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었지만 한참을 그냥 앉아 있었다.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

4.19혁명 때였다.

조선일보 사진기자인 아버지는 광화문 네거리에 있었다. 경찰이 카빈총을 들고 있었다. 총구가 향한 곳을 봤다. 길 건너편에 구두닦이 소년. 회사로 구두를 가지러 자주 오던 아이였다.

총소리. 아이가 개구리처럼 펄쩍 뛰었다가 쓰러졌다. 아버지는 카메라를 들지 못했다. 무서웠다. 골목으로 뛰어가 숨었다.

"평생 후회했다."

생전에 소주잔을 털어 넣으면서 아버지가 말하곤 했다.

"사진기자로서 셔터를 눌렀어야 했는데. 그 순간 나는 도망쳤다."

아버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너는 나처럼 비겁하게 살지 마라."

나는 차를 몰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앞 유리를 두드렸다.

1998년 10월 23일 저녁 8시였다. 지하철 까치산역 주위는 화려한 네온이 명멸했다.

나는 1번 출구 앞에서 고영근 목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출구 앞에는 가난한 여자가 바닥에 싸구려 빵을 놓고 팔고 있었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퀭하게 들어갔다.

"오시느라고 수고하셨네요."

예순여섯의 나이에도 어린애 같은 웃음을 지으며 고영근 목사가 다가왔다. 국민복 차림의 고 목사는 낡은 가죽가방을 들고 있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30년 전 제가 이곳에 정착할 때만 해도 여기 전부 논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됐으니...."

그가 화려한 네온이 번쩍이는 모텔들을 보며 안타까워 했다. 15분쯤 언덕으로 난 길을 올라가 허름한 집 철 대문 앞에 섰다.

"이 집은 제가 16년간 노동으로 일군 과수원을 팔아서 마련했던 거예요. 그래도 이집을 팔지 않고 자식들이 다 공부를 마쳤으니 주님께 감사해야죠. 내가 죽으면 이 집은 사회에 환원할 겁니다."

그는 나를 대문 옆 주차장을 개조해 만든 방으로 안내했다. 한쪽 벽을 차지한 앵글로 만든 서가에는 책들이 가득했다.

"여기 44종류의 책들을 보세요. 이건 내가 그동안 발행한 책들이예요."

책장에는 그가 만들었다는 책들이 열병식을 하듯 도열해 있었다.

"바르게 살아가는 법을 내가 직접 글로 쓰고 책으로 만들어 일 년에 만 권씩 세상에 그냥 줬어요. 지금까지 마흔네 권을 뿌렸으니까 그 돈만도 몇 억 원이 들었지요. 나한테 정기수입은 없는데도 신기하게 그런 사업을 벌리고 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 같습디다."

그가 불가사의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어린애같이 씩 웃었다.

나는 그 44권의 책들을 바라보았다. 직접 쓰고, 만들고, 뿌렸다. 법정에서 이길 수 없다면 이렇게 하는 방법도 있을 것 같았다.

"감옥에 있을 때 옆방에 비전향 장기수가 있었어요. 그 사람과 논쟁을 했는데 결국 내가 남한이 북한보다 자유롭다고 따졌더니 할 말이 없어 하더라구요."

고 목사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그 사람이 되물었어요. '목숨을 걸고 북한에 선교하러 간 목사가 있느냐. 몇 억 원 헌금하는 신자와 거지를 똑같이 대하는 목사가 있느냐. 바른 소리를 하던 목사들이 며칠 만에 반성문 쓰고 나가더라.' 순간 말문이 막혔습디다."

그 비전향 장기수의 반박에서 나는 어떤 섬찟한 진리를 느꼈다. 날카로운 비판은 정확한 이쪽의 실체였다.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스스로 십자가를 져야 했다.

"잘 가슈."

그 노목사의 배웅을 뒤로 하면서 나는 밤 언덕을 내려가고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돌아왔다.

조진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상은 그래도 아름답습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나처럼 비겁하게 살지 마라."

고영근 목사의 서재가 떠올랐다. 44권의 책들이 도열해 있던 모습. 나는 쓰기로 했다. 법정에서 이길 수 없다면, 역사의 법정에 증언하겠다.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았다.

노트북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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