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사진을 찍어 선물로 보내 준다고 했다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소설가 정을병(사진 김정례 블로그), 목사 엄흥도
소설가 정을병(사진 김정례 블로그), 목사 엄흥도

나보다 10여 년 위인 고교 선배가 내게 그 친구의 죽음을 알려 왔었다.

"서일규가 죽었는데 자기가 죽는 걸 알았는지 죽기 하루 전에 친구들 50명을 불러서 밥을 사는 거야. 그리고는 미리 준비해 온 타이 슬링을 친구들 한 명 한 명에게 걸어 주더라구"

그는 정말 다음 날 죽을 걸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모르고 한 것일까. 어쨌든 독특하고 멋진 작별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일규라는 그 고교 선배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한여름 그를 처음 봤을 때였다. 허름한 남방 셔츠에 수수한 바지를 입은 영감이었다. 손때 묻은 낡은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그가 나의 양해를 얻고 내 사진을 찍었다. 취미인 것 같았다. 얼마 후 깨끗하게 인화된 사진이 우편으로 왔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사진을 찍어 선물로 보내 준다고 했다. 작은 것이라도 주위에 나누어주고 베푸는 성격 같았다. 수수한 옷차림과는 달리 그는 부자였다. 성수대교 부근을 건널 때 옆으로 보이는 레미콘 공장이 그의 소유라고 했다. 젊은 시절 사업에 성공해 아들에게 경영권을 넘기고 노년을 여유 있게 살던 분이라고 했다. 욕심은 끝이 없는 것인데도 적절한 시점에 돈 벌기를 중단한 것을 보면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죽음은 삶과 포개져 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잘사는 방법을 아는 것이 아닐까. 동시에 죽음을 앞둔 마지막 행동에서 그 인간의 진가가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하다.

암에 걸려 죽음을 앞둔 법무장교 동기생이 있었다. 미소년 같은 고운 얼굴에 항상 잔잔한 미소를 짓던 사람이었다. 동기생 중에 가장 먼저 대령 진급을 하기도 했었다. 그가 죽기 몇 달 전 동기생들에게 사과 한 상자씩을 보냈다. 그 사과를 먹으면서 마음이 짠했다. 아직 윤기가 남아 있을 때 부드러운 바람을 타고 떨어지는 낙엽처럼 그는 조용히 다른 세상으로 옮겨 갔다. 그가 마지막으로 선물한 사과의 향기가 기억의 창고 안에 은은히 배어 있다.

소설가 정을병 선생이 살아있을 때 자주 만났었다. 사건 관계로 인연이 됐는데 나의 문학적 스승이 되어 버렸다. 그는 내가 쓴 소설을 문단에 추천해 주었다. 그는 원고지 일곱 장 정도에 내 작품에 대한 평가를 손글씨로 꼼꼼하게 써서 건네주었다. 

혼자 외롭게 살던 그가 암으로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내게 그의 문학 교과서였던 영국작가 서머싯 모옴의 창작 노트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가 줄치면서 공부했던 정신세계의 책 몇 권과 함께 애지중지했던 난 화분도 주었다. 그에게서 큰 선물을 받은 셈이다. 

그 후 그는 평생 살아왔던 자기집의 방에서 조용히 무의식의 세계로 건너갔다. 아름다운 마무리였다.

96살의 엄두섭 목사를 찾아가 만난 적이 있다. 불교계에 고승이 있는 것처럼 기독교계에서는 그를 깨달은 분이라고 했다. 그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을 찾아갔었다.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하나님이 대화를 하고 있는 우리 옆에도 계셔. 영이라서 우리가 보지 못할 뿐이지만."

노인의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였다. 그가 이런 말도 했다.

"평생 일선(一善)도 못했어. 모두 위선(僞善)이었어. 젊은 날 대중 앞에서 한 말과 행동이 모두 내가 잘나 보이고 싶은 위선이었지."

깊은 통찰에서 나온 말이었다. 노인은 깨달음을 얻고 쓴 원고의 초안이 담긴 얇은 책자를 내게 선물로 건네주었다. 얼마 후 그 노인이 하늘나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이 사라져 가는 모습은 당당하고 아름다운 것 같았다. 나는 도저히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다. 상황에 따라 순간적으로 변하고 비겁할 것 같다. 나 같은 사람을 묘사한 옛글을 읽은 적이 있다.

영조 때 제주도에 살던 선비 장한철은 과거를 보려고 배를 타고 떠났다가 풍랑을 만나 오키나와까지 표류했다. 파도에 치솟고 잠기는 부서진 배에서 죽음을 앞두고도 그는 자신의 각오를 이렇게 글로 남겼다.

'만일 내가 살아서 돌아간다면 응당 글 읽는 일을 던져 버리고 몇 고랑 안되는 밭을 갈면서 살리라.'

그는 살아서 돌아왔다. 그는 다시 과거급제를 향한 세계로 갔다. 다시 서울로 향했고 낙방했다. 그게 인간일 수도 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죽기 전 주위 사람들에게 무슨 선물을 하면 좋을까. 죽은 선배의 얘기를 들으면서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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