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이 되어 여기저기 투자했다가 실패했어요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세바시 유튜브 캡처
세바시 강연 유튜브 캡처

나는 1970년대 전반에 잠시 외판원을 한 적이 있었다.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전집류를 파는 일이었다. 나는 내가 파는 상품에 대해 확신도 없었고 그렇다고 세일즈맨으로서의 자세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다 동정으로 마지못해 사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부잣집에 가면 거실의 서가에 브리태니커 사전이 번듯하게 위용을 자랑하며 꽂혀 있었다. 한글로 된 책 한 권을 팔기도 힘든데 어떻게 그런 영어로 된 책이 그곳에 와서 있을까 신기하게 여겨졌다. 50년 만에 그 의문이 풀린 것 같다.

어제 유튜브를 통해 한 재벌 회장의 인터뷰를 봤다. 그 역시 1970년대 전반에 책 외판원으로 시작해서 재벌 그룹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가 팔았다는 책은 내가 의문을 품었다는 영어로 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책 외판원으로 인생을 시작하면서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 비관이 들기도 했어요. 그러다 수많은 훌륭한 사람이나 성공한 사람을 구경하고 그 사람들이 사는 광경을 본다는 게 참 좋은 사회 경험일 수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긍정적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나와 시각이 달랐다. 나는 외판원을 할 때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미래에 훌륭하게 될 내가 잠시 스치는 과정이라고 여겼다. 그가 말하듯, 상대방들을 보지 못하고 나만 보는 외눈박이였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저는 아침이면 옷을 차려입고 커다란 거울 앞에서 먼저 책을 파는 연습을 했어요. 상대방에 따라 어떤 말을 해야 할지 표정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미리 생각하고 연습해 봤어요.“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사전 연습이 치열했다. 유명학원의 일타강사였던 아는 사람은 집에서 숟가락을 꽂은 소주병을 마이크 대신 들고 강의를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고 했다. 큰 칠판을 벽에 걸어놓고 그가 외우고 또 외운 영어 문장을 손을 뒤로 해서 보지도 않고 물 흐르듯이 쓰는 연습을 끊임없이 했다고 했다. 수강생들이 그 모습만 보고도 감탄하게 만들려고 그랬다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이면에는 그런 치열함과 인내 재미없는 반복을 계속하는 연습의 시간이 뒤에 숨어 있었다. 나는 인터뷰를 하는 재벌 회장의 다음 말을 듣기 위해 귀를 쫑끗 세운 채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팔았던 브리태니커 사전은 영어로 되어 있었어요. 사는 사람도 못 읽고 파는 저도 물론 못 읽죠. 그 시절 그걸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내가 그걸 팔러 다닌 거죠. 저는 책을 파는 게 아니라 문화를 판다고 생각했습니다. 1970년대인 그때는 돈을 벌면 사람들이 우선 자개농을 사고 집의 바닥에 유럽풍으로 대리석을 까는 게 유행이었어요. 저는 그런 집들을 찾아가 거실에 근엄한 서양 문화를 배치하라고 권했죠. 아이들이 그걸 보고 영어를 배우고 싶은 마음도 들고 집안의 품위도 올라간다고 했죠."

그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지적인 허영을 절묘하게 자극한 것 같았다. 이해를 하지 못해도 노벨문학상을 탄 작품이라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책을 샀다. 외국의 유명화가의 작품전이라면 관람객이 끝도 없이 늘어선다. 

부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다. 뭔가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그는 보고 바로 행동으로 옮긴 것 같았다. 

남다른 세일즈 재능을 가진 그는 상승기류를 타고 그냥 날아오르기만 했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그 회장도 날개 없이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듯한 그런 순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자기가 겪은 좌절의 경험을 이렇게 얘기했다.

"회장이 되어 여기저기 투자했다가 실패했어요. 그게 법적으로는 배임죄가 되는 것 같더라구요. 검찰청에 불려 가 조사를 받았어요. 남들은 모두 나를 보고 망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더라구요. 애초에 아무것도 없이 출발했는데 망했다는 그 순간에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너무 많더라구요. 실망이나 좌절감이 전혀 들지 않았어요. 검찰청에 불려가도 대기하는 동안 체조를 하고 아무렇지도 않아 하니까 모두 이상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더라구요."

그의 일생이 담겨 있는 짧은 말 몇 마디에서 나는 귀한 진주를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 역시 인생살이를 출발할 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잃어버릴 게 없었다. 그게 내 삶의 본전이었다. 인생 자체가 빈 손으로 세상에 나와 빈 손으로 간다는 말과도 통한다. 다 잃어버려도 본전이다. 인생의 시간이 흐를수록 이익과 행복만 존재한다. 그런 마음가짐이 하나의 구원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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