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처음 왔을 때 내가 살았던 환경과는 180도로 다른 현실을 접하고 깜짝 놀랐다
서명원 신부 (캐나다인으로 경기도 여주에서 도전돌밭공동체 운영)

오늘은 내 젊은 시기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한다.
어린 시절과 사춘기 시절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 곰곰 생각하다보니 어디서 시작할지… 사실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태어난 후부터 25살까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는 건데, 어떤 흐름을 보여주는 실선이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이 되지 못하는 점들이 산만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 연결되지 않는 점들을 살 살펴서 심사숙고하면 어떤 점선이 생기고, 실선으로 이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내가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는지, 그리고 어린 시절과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중고등학생 시절과 사춘기에 해당하는 시절과 대학교에 다닐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19살 때 의대공부를 하기 위해 프랑스에 유학하던 시절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의대에 다니기 시작할 때의 핵심은 가족과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게 되었고 진짜 내 인생의 길을 바야흐로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그 전까지는 가족과 함께 살다보니 내가 뭔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뭘 해야 하는지부터 시작해서 인생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의대에 재학하고 있던 25살에 상당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부모님과 관계에서 어떠한 거리를 두게 되는 시점이 있었다. 그렇지만 부모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 전까지 살아온 25년간의 인생 여정은 전환점의 준비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내가 언제 어디서, 그리고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는지에 대하여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나는 1953년생이고 12월 14일에 5남매 중의 세 번째로 태어났다.
6.25가 끝났을 무렵이라, 한국 사람들은 나에 대해 “당신은 6.25 전쟁 때 전사했고 약소국의 설움에서 벗어나고자 강국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윤회설을 인용해 구체적으로 말한다. 매력적인 이야기이지만 나는 그걸 입증할 수 없다.
내 형제 중 첫째는 누나였다. 어머니는 공주 한 명을 원했고 나머지 4명은 사내아이들이었다. 둘째인 형과 나는 연년생이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셋째인 내가 너무 빨리 태어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당시 부모님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피임하였지만 그 적중률이 높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여튼 어머니가 상당한 긴장감 속에서 나를 낳았기 때문에 나는 선천적으로 어떤 불안감이 좀 있다. 나의 어떤 특징 중 하나는 어떤 애정결핍증 같은 것이 있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인정하는 게 낫다고 본다. 돌이켜보면서 어떻게 하면 그 애정결핍증과 함께 건전하게 살 수 있는지에 대해 좀 많이 배우게 되었다.
내 뒤로 남동생 두 명이 태어났다. 나는 첫째와 둘째, 그리고 넷째와 다섯째 사이에 끼어 있어서인지 넷째가 태어났을 때 내 자리를 남동생에게 빼앗겼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 자리를 잡으려고 했던 것인지, 남동생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자기 자리를 얻으려고 하고, 찾으려고 하고, 인정받으려고 하고, 사랑받으려고 한다. 사실 성숙해서 깨닫게 되지만,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보다는 인정해주는 거다. 사랑받으려고 하는 것보다 사랑을 베풀어주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 집은 캐나다 퀘백주 몬트리올에 있었고 아버지는 소아과 의사였다. 의사였다고 말하면 “돈이 많았겠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돈을 벌었을 뿐이고 우리집은 가난하지도 않았고 아주 부유하지도 않았다.
내가 받은 교육은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휴대폰이나 이메일 같은 것들은 물론 TV도 전혀 없었다. TV가 처음 나왔을 때는 칼러TV가 아닌 흑백TV 정도밖에 안 됐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시골에서 자란 후 도시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사고방식이 ‘시골’스러웠다고 볼 수 있다.
이 대목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내가 프랑스계 사람이라는 점이다. 북미 지역에서 사는 프랑스계 캐나다 사람들은 1,000만 명 정도 되는 소수민족이고, 역사적으로도 영국에게 정복되어 지배를 받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흔히 내가 코가 크고 원숭이처럼 털이 많고 피부가 하얗기 때문에 ‘미국놈’이라고 생각하고는 한다. 사람들이 나를 ‘미국놈’이라고 부르면 기분이 좋지는 않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는 프랑스계 캐나다 사람과 영국계 캐나다 사람, 그리고 이민자들이 함께 사는 동네였다. 그래서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내가 살았던 환경과는 180도로 다른 현실을 접하고 깜짝 놀랐다. 인종적인 측면에서 한반도에서 사는 사람들은 단일민족, 순혈주의, 배달민족 등이라고 부르는 하나의 민족인 반면 내가 살았던 몬트리올은 상당한 다양성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우리는 집에서 불어로 말했지만 영국계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서 살았기 때문에 학교에 가면 영어를 배웠고, 마을에서도 영어를 계속 활용해야 했었다. 특히 죽마고우 중 으뜸인 친구가 영국계 캐나다인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놀면서 늘 영어만 사용했다.
우리 아버지는 초등학교에 입학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모두 로욜라 재단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다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맥길대(McGill) 의과대학을 다녔던 아버지는 모두 영어로 교육을 받았고 근무하는 병원들도 영국계 병원이라서 사회활동을 하는 동안 영어를 사용했지만 집에서는 불어로만 말했다.
우리 집안의 친척 가운데 영국계 캐나다 사람들과 결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영국계 사람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같이 어울려 살면서 서로의 언어를 공용어로 생각하면서 구사했다.
마을에는 이민자들도 살았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이민자들과 함께 사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다. 캐나다는 이민자들 없이는 살 수 없다. 작년에만 50만 명의 이민자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원주민들에 관한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캐나다 원주민에 대하여 별로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원주민들은 야만인들이었고 그들을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교육시켰으며 우리 덕분에 원주민들이 올바른 종교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어른이 된 후에 알게 되었다. 사실은 캐나다 정부가 ‘원주민 말살 정책’을 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깜짝 놀랐다. 뿐만 아니라 원주민들이 우리 문명의 사람들보다 자연계와 관계를 훨씬 더 잘 맺으면서 살았음을 발견했을 때 깊이 반성하기 시작했다. 이 부분은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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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출신의 예수회 신부. 본명은 베르나르 스네칼. 캐나다 퀘벡주(州)의 의사 집안 출생. 프랑스 보르도 의대 재학 중 예수회에 입문. 1984년 한국에 파견된 뒤 불교 공부에 심취.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로 불교 강의. 현재 '도전돌밭공동체' 운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