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독립신문 상해판에서는 일본군 157명을 사살, 300여명 부상인 반면, 독립군 측은 전사 4명 , 중상 2명

강호논객 한정석
홍범도 장군의 무장독립투쟁을 상징하는 '봉오동 전투'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독립군과 일본군 간의 사상자 규모다.
현재 일본측 주장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자료는 야스카와 추격대의 '전투상보' 내용이다. 여기에는 전사 병졸 1명, 부상 병졸 1명, 순사 1명 부상으로 되어있다.
반면 1920년 독립신문 상해판에서는 일본군 157명을 사살, 300여명 부상인 반면, 독립군 측은 전사 4명 , 중상 2명이다.
그런데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양쪽 다 문제가 있음이 밝혀졌다. 일본측 자료 '봉오동 전투상보'는 같은 보고서에서 다른 면의 출병 숫자가 다르게 기재되어 있고, 독립신문은 호외판에서 일본군 사상자 숫자를 또 다르게 보도했던 것이다.
따라서 현재 양측 사상자 집계는 한국사에서는 '불명(不明)'으로 보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하지만 좀 더 신빙성있는 자료가 있다. 양측의 사상자를 외부에 발표하는 자료가 아니라 내부에 보고하는 자료일 경우다. 그것도 일본군이 아니라, 함께 토벌전에 투입된 일본 경찰에 의한 내부 보고라면 우리는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봉오동전투에 대해 일본 영사관 경찰 소속 와쿠이(和久井) 경부(警部)의 보고를 보면, “봉오동에서 아군(我軍)의 사망 병졸 1명, 부상 5명 7명 혹은 십수명이라고 한다”고 현지 조사후 출장복명하는 내용이 보인다. 일본군 사망자는 1명이고 부상은 십수명이라는 보고다.
이 보고 내용은 언론이나 일반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구글 검색에도 나오지 않는데, 2020년 재외한인학회 주최 학술회의 발표에서 성균관대 장세윤 교수가 발표 논문을 대폭 수정하면서 2021년 3월에 발굴 게재한 것이다.
와쿠이 보고가 신뢰성있는 이유는 일단 야스카와 추격대의 보고와 얼마간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일본 경찰이 일본군의 통제나 협조에 응했다면 야스카와 보고서와 동일하게 보고했을 것이다.
이 보고에서 사망자 수는 야스카와 추격대의 봉오동전투 상보와 대략 일치한다. 야스카와 추격대의 전투상보가 출병 수 부분에서는 오류가 있지만 사상자 집계는 정확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월강 추격대의 야스카와가 장성이나 영관급이 아닌 대위 신분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부대원 사망자를 축소 보고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일본군은 전사자의 가족을 '精神家(정신가)'라고 불렀다. '다이와(大和)정신'을 가진 가족이라는 것이고, 참전 군인이 전사할 경우, 반드시 찾아가 예우하는 것이 군율이었다.
만일 독립신문의 보도대로 일본군이 200명 이상 사망했는데 이를 1명으로 축소했다면 나머지 199명의 '정신가' 가족들은 버려지게 된다. 이런 것은 당시 일본의 상식과 관점으로는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정규군의 경우, 전사자 집계는 내부적으로 매우 정확하게 이뤄질 수 밖에 없다. 출병한 부대는 반드시 소대로 나뉘어 점호를 하고 전투가 끝난 후에도 점호를 하기에 집결되지 않은 인원 숫자가 바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일본 경찰에 의한 봉오동 전투 사상자 현지 조사 보고는 외부 발표가 아닌 내부용이기에 신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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