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情)이 없으면 한(恨)도 없다!
[최보식의언론=신성대 논설위원]

탄핵된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내린 무기징역 선고를 보니 이 민족이 참 잔인하다는 느낌이 든다. 심저에 깔려있는 두려움과 비겁함, 트라우마와 콤플렉스의 변태적 표출이 아닐까 싶다.
복에 겨워 제 무덤 스스로 판 그에게 눈꼽만큼의 동정심도 보태고 싶지 않지만, 이런 '한풀이 문화'가 이제는 너무 지겹다.
사람은 누구나 정(情)이 있어서 그리워(思)하고 즐거워(樂)하며 분노(怒)하고 시름(愁)한다. 또 좋아(好)하고 싫어(厭)하며, 사랑(愛)하고 미워(憎)하며 한평생을 살아간다.
대개 우리의 민족성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배운 것이 바로 단군신화에서 나오는 곰의 '끈기'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 온 이야기이다.
그 다음으로 배운 것이 바로 '정(情)'과 '한(恨)'이다. 이 두 단어를 주제로 잘 미화시켜야 한국적인 문학이나 예술로 대접받는다. 이 한(恨)을 집요하고 물고 늘어져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것 아닌가?
그런데 이 두 낱말은 원래 원천적으로 '마음 심(心, 忄)' 변에 뿌리를 둔 한 자손들이다.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이면서 서로 등을 진 반대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情)이 깊으면 한(恨) 또한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 정(情)과 한(恨)이 서로 얽히고설킨 실타래들이 주변에 흔하다.
한국인들의 정(情)은 너무 끈끈해서 닿기만 하면 붙어 버린다. '너'와 '나가 곧 '우리'가 되어 버린다. 그렇지만 너무 예민해서 조금만 소홀하면 한(恨)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한(恨)은 정(情)으로 만들어지지만, 상한 음식처럼 정(情)으로 되돌리지는 못한다.
정(情)으로 꼬인 끈은 질기다. 여간해서 끊어지지도 않는다. 서툴게 끊으면 한(恨)이 되어 양쪽을 옭아맨다. 정(情)은 무심(無心)의 칼로 끊어낼 수 있지만 한(恨)은 알렉산더 대왕의 칼로도 못 끊는다.
게다가 한국인의 한(恨)은 정(情)보다 더 끈끈한데다 세월을 먹고 계속 자란다. 갈수록 풀기 어려워진다. 그게 원한(怨恨)이다. 살아서 못 풀면 죽어 귀신이 되어서라도 꼭 풀어야 한다. 한(恨)을 풀지 않고는 저승 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이승과 저승 사이를 헤매고 다닌다. 그게 ‘전설의 고향’이다.
그런데 이 정(情)과 한(恨)을 미화시켜 우리 민족만이 가진 대단한 미덕(美德)으로 승화시켜 어릴 적부터 가르치고 있으니, 이게 영 마뜩치가 않다.
이 정(情)을 줄기로 자라는 곁줄기들이 있는데, 바로 '연(緣)'이다. “우리가 남이가?” “우리끼리!”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혈연(血緣)·학연(學緣)·지연(地緣) 등등 온갖 연(緣)들이 퍼져 나온다.
가장 흔한 예로 어떤 회사에서 필요한 사람을 친인척 혹은 학연으로 채용했을 경우, 채용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나하고는 특별한 관계니까 남보다 더 잘하겠지', 반대로 채용된 입장에서는 사장이 '남보다 더 잘 봐주겠지'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물론 이것이 서로 잘 유지될 때에는 남보다 훨씬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만, 자칫 어느 한쪽이 소홀할 경우 남보다 더 큰 상처를 주게 된다.
당연히 연(緣) 또한 끊어지면 한(恨)이 된다. '내가 저한테 어떻게 해주었는데..' 그렇다고 당장 어쩌지도 못하고 속으로 곪을 대로 곪다가 터진다. 그러고 나면 서로 한을 품고 평생을 “죽일 놈! 살릴 놈!” 하면서 원수 아닌 원수로 지낸다.
그렇게 이 정(情)과 한(恨)에서 온갖 곰팡이와 독버섯들이 생겨난다. 고질적인 지역 감정·청탁·부정·배반 등등. 코드 정치니 오기 정치니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이 뿌리에서 나온 것들이다.
정(情)은 가늘고 가는 마음의 끈이다. 잘 갈무리하지 않으면 바로 헝클어져 버린다. 한번 헝클어지면 여간해서 풀어낼 수가 없다. 그럴수록 더 엉켜든다. 가까이 두면 언젠가는 제 몸을 옭아 묶는다.
현대는 모든 것이 승부의 세계이다. 경쟁은 공정해야 하는데 한국인들은 이 연(緣)에 얽혀 무시로 공(公)과 사(私)의 경계선을 넘나들고 불공정과 불복, 그리고 한(恨)을 낳는다. 그래서 경제는 선진국이지만 국민성은 아직 후진성을 못 벗어던지는 것이다.
한(恨)이 덕(德)이 될 수 없듯이, 정(情) 역시 덕(德)이 되지 못한다. 정감(情感) 혹은 정취(情趣)라 하여 예술가나 한가한 인생들이 기대고 즐기기에는 좋으나, 있는 그대로는 결코 사회적 도덕규범으로 교육되어야 할 대상은 될 수 없다.
정(情)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인간 본성의 발현이다. 흔히 우리는 어떤 사람을 이야기할 때 정이 많은 사람, 혹은 적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누가 더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사람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온정주의(溫情主義)는 부정과 부패, 그리고 부조리를 키운다. 지나치게 정(情)을 따르다 보면 욕(辱)을 당하기 십상이다. 사람과 사람은 신(信)으로 맺어져야 이상적인 관계가 이루어진다. 신(信)은 한(恨)을 낳지 않는다. 신(信)은 깨지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정(情)은 마음이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바뀔 수 있는 것이 마음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의 개입을 거부한다. 이걸 그대로 두고는 어떤 개혁도, 어떤 제도도 이 땅에서는 제대로 자랄 수가 없다.
하여 정(情)은 그 자체로 가치가 되지 못한다. 그렇지만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 즉 박애(博愛)와 관용(寬容)과 자비(慈悲) 등 인(仁)의 밑거름이 될 수는 있다.
덕(德)은 정(情)이 한(恨)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는 방부제이다. 정(情)을 잘 절제하고 다스려 사회적인 덕목으로 승화시킬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 그것이 곧 '덕육(德育)'이다.
애초 정(情)이 없었으니 한(恨)이 있을 리 없을 터! 윤석열 전 대통령이 항소를 하든 말든 관심 없지만, 문득 푸시킨의 시 한 줄이 떠오른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그가 국민을 속였지, 국민이 그를 속인 적 없으니 말이다. 덕(德)없음을 자책할 일이다.
#정과한 #한국사회문화 #덕의부재
《혼백론》의 저자.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1954년 경남 영산(靈山) 출생하여, 16세에 해범 김광석 선생에게서 조선의 국기인 무예 십팔기(十八技)를 익힌 이래 40여 년 동안 십팔기의 전승과 보급에 힘써 왔다. 현재 (사)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 회장으로 십팔기와 더불어 도인양생공을 지도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