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돈은 내 돈, 내 돈은 네 돈... 선물과 뇌물, 그리고 사랑
[최보식의언론=윤정구 이화여대 경영대학 명예교수(인사조직 전략)]

따지고 보면 사랑도 주고 받는 거래의 일종이다. 다만 상품이나 서비스와 같이 계량화하고 가격을 흥정할 수 있는 시장 거래가 아닌 거래여서 통상 사회적 교환(사회 거래)이라고 칭한다.
친구 사이에 도움을 주고 받는 거래나 선물을 주고 받는 등의 거래도 사랑과 같이 사회 거래다. 우리 일상에서 거래되는 것을 분류해보면 시장 거래는 빙산의 윗부분이고 사회 거래는 빙산의 아랫부분이다.
시장 거래를 중심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개념을 퇴니스(Tönnies)라는 학자는 이익사회(Gesellschaft)로 사회거래가 만든 사회를 공동체(Gemeinschaft)로 규정했다. 사회계약론을 기초한 루소(Rousseau)는 빙산의 윗부분인 이익사회가 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빙산의 아랫 부분인 공동체의 계약이 지켜져 이익사회의 시장거래를 떠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윗부분의 시장 거래가 오랫동안 계약서에 있는 대로 신의 있게 행해지면 사람들은 신뢰를 기반으로 아랫부분의 사회거래까지 확장한다. 이때 동원되는 거래는 선물이 대표적이다.
선물은 빙산의 윗부분의 시장 거래가 빙산의 아랫부분의 거래까지 확장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어서 진정한 의미의 선물이 통용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된다. 선물과는 반대로 아랫부분의 사회적 거래를 빙자해 윗부분의 시장 거래를 확장하려는 노력은 뇌물이다. 뇌물은 시장에서 최적화된 상태로 이뤄지는 거래를 왜곡해서 시장질서를 파괴하는 주범이다. 김건희 일가의 뇌물거래를 심각하게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들이 사회붕괴의 주범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거래에 해당하는 사랑을 주고 받는 것도 시장거래처럼 흥정이 가능할까? 사랑을 시장거래로 풍자하는 장면은 드라마의 단골주제다.
이수일과 심순애가 나오는 ‘장한몽’에서 사회적 거래인 사랑을 시장거래로 취급한 심순애에게 이수일이 묻는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도 좋더냐?"
1990년대의 인기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최민수가 분한 대발이와 하희라가 분장한 지은의 대화에도 두 집안의 사랑에 대한 개념충돌이 등장한다.
"사랑이 밥 먹여 주냐?"
‘가을동화’에서 주인공 준서(송승헌)의 동생 태석(원빈)은 은서(송혜교)에게 사랑을 포기하라고 말하며 외친다.
"사랑? 웃기지마. 이젠 돈으로 사겠어. 얼마면 될까? 얼마면 되겠냐?"
사랑이 시장거래가 아닌 것만은 분명한데 사랑과 같은 사회적 거래도 거래가 되기 위해서는 받는 것이 있으면 주는 것이 있어야 되고, 또한 지속되기 위해서는 주는 것과 받는 것의 형평성이 도달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사회학자 굴드너(Gouldner)와 호만스(Homans)에 의해서 제기되고 연구되어 왔다.
시장에서의 상품과 서비스 거래와는 다른 방식의 주고 받음(Reciprocity)과 형평성이 사랑의 주고받음에도 작동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개념이 "네 돈은 네 돈이고 내 돈은 내 돈이다"라는 시장거래의 독립계좌 개념과 구별되는 "네 돈이 내 돈이고 내 돈이 네 돈이다"라는 주머니 돈이 쌈지 돈의 개념인 공동계좌(Joint Account) 개념이다. 시장거래의 결과는 독립계좌에 반영되지만 사회거래의 결과는 대부분 공동계좌에 적립되고 반영된다.
문제는 사회거래인 사랑과 같은 공동계좌를 운영하고 있으면서 내가 사랑을 준 만큼 계산기를 두드려가며 상대에게 사랑을 요구하면 사랑을 시장거래로 취급하는 것이어서 관계가 깨진다. 사랑하는 관계에서는 준 것에 대해 곧바로 반대 급부로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 금기시되어 있다. 그럼 사랑과 같은 사회거래에는 형평성이 필요없는 것일까?
아니다. 시장거래에서는 준 것만큼 즉각적으로 받아야 하는 단기적 형평성이 요구되지만 사랑과 같은 사회거래에서는 장기적 형평성을 전제로 한다. 또한 시장거래는 모든 것을 금전적으로 환산해서 형평성에 대한 계산기를 두드리지만 사회거래에서는 이렇게 계산기를 두드리는 행위는 사회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신호여서 관계가 청산된다.
사랑과 같은 사회거래도 곧바로 계산기를 두드려 장부를 맞추지는 않지만 장기적 형평성이 유지되어야 사회라는 공동체가 유지된다. 형평성이 유지되는 단위도 사랑을 준 사람과 받은 사람 사이의 직접 거래가 아니라 이 둘이 포함된 공동체다.
예를 들어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손자를 사랑하지만 사랑 받은 자식이나 손자가 부모나 조부에게 사랑을 갚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과 손자에게 받은 만큼의 사랑을 베풀게 되어서 결국 계산을 하면 받은 만큼 사랑을 베푸는 장기적 형평성에 도달한다.
부부 사이에 독자적 계좌를 가지고 서로가 상대에게 돈을 융통할 때 은행이자보다 비싼 이자를 요구한다면 굳이 가족을 만들어 경영하는 부부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부부 사이에 이런 공동계좌가 가능한 것은 부부관계라는 사랑의 공동계좌가 존재하고 이 공동계좌를 통해 주머니 돈이 쌈지돈인 사회거래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서로 간 사랑이 깨져 이혼을 할 경우 가장 중요한 일이 그간 공동운영되고 있던 계좌의 잔고를 나누는 일이다.
사랑은 주고 받는 것은 맞지만 돈거래처럼 주고 받는 것으로 생각하면 사랑을 잃는다. 누구에게 사랑을 준 만큼 상대에게는 직접 받지 못해도 사랑의 효과는 돌고 돌아 반드시 자신에게 다시 돌아온다. 조강지처 불하당이라고 조강지처를 버리고 욕정의 사랑을 찾아 떠난 남편도 결국은 조강지처에게 돌아와 사랑의 빚을 갚게 되어 있다.
사랑은 이런 장기적 형평성을 떠나서 삶을 가장 생산적으로 만드는 추동력이자 죽어가는 삶의 묘약이다. 삶에 지쳐 쓰러진 사람이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을 포함해 사랑해야 할 대상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상대를 주인공으로 일으켜 세운다. 사랑하는 연인들을 만나면 ‘영화 찍느냐’고 묻는 이유도 과도하게 상대를 주인공으로 대우하기 때문에 농담 비슷하게 하는 말이다. 사랑하게 되면 이들 삶이라는 장면에서 공동의 주연 배우가 탄생하는 셈이다.
사랑하게 되면 게으른 사람도 공동 주연인 상대에게 잘 보이기 위해 꾸미고 부지런해진다. 사랑이 식으면 상대를 주연배우 자리에서 끌어내려 조연으로 삼거나 자신의 욕구에 봉사하는 도구로 삼는다. 사랑이 없다면 홉스(Hobbes)가 예언했듯이 세상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장으로 전락한다.
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관계를 이용해서 같이 가족을 이뤄 살아야 할 공동의 존재목적을 발견하고 존재목적을 사랑하게 된다면 결혼을 넘어 지속가능한 사랑의 기반이 만들어진다.
결혼을 하고 가족을 만들 때 했던 공동의 목적에 대한 혼인서약을 잃지 않는다면 이들이 이혼할 개연성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자신들의 관계를 유지해 같이 일어서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윤정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jkyoon@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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