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도 감도 포도도 한과도 사다놓으라고 해서 그대로 했다. 본인은 한개도 들지 못하고 떠났다

[최보식의언론=장석영 대한언론인회 회장]

필자 부부
필자 부부

대한언론인회 사무실에 나오니 가정사를 잊을 정도로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연속되는 회의에 오찬 모임에 아내와 관련된 자잘한 일처리까지 진행하다보니 오후 5시 퇴근시간도 잊었다. 사무총장의 채근에 부랴부랴 중절모를 쓰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광화문 거리는 시위꾼들이 지나가서 그런지 더 쓸쓸한 것 같다.

한 주 전만 해도 빨리 귀가해서 아내를 돌봐야 하기에 시청지하철역까지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으나 이젠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 그래서 시청에서 광화문 네거리까지 괜히 실성한 사람처럼 터벅터벅 걸어갔다가 되돌아오길 세번째다. 노량진 지하철역에서 내려 마을버스정류장으로 오다가 저절로 발걸음이 멈춰진다. 맥도날드 가게가 눈에 들어와서다. 아내의 흔적이 거기에 배어 있다.

꽤 오래전부터였다. 아내는 나와 시내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올 때면 반드시 이 가게에 들어가서 아이스크림을 한개씩 먹고 집으로 갔다. 추운 겨울이라고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었다. 아내는 아이스크림을 들면서 세상사부터 가정과 이웃 교회 이야기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해준다. 그리곤 나의 의견을 듣고 싶어 했다.

나는 대충 듣는둥 마는둥 하고 아이스크림 먹기에만 열중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달변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다스러운 여자도 아닌데 왜 그럴까’ 하는 생각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본인의 남은 시간이 아까워서 그랬나보다. 그때 좀 더 다정스럽게 대화의 상대가 되어주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아내가 발병하고부터는 내가 그 집에 들려 10개씩 사다가 냉동실에 넣어두고 먹고 싶을 때 먹게 했다. 내가 같이 있을 때는 나도 같이 먹어라고 성화였다. 아내는 이별하기 보름 전부터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았다. 지금 한 5개 정도가 냉동실에 들어있다. 아마 내가 먹어치우려 해도 목이 메어 먹지 못할 것 같다.

지난 추석을 보름 정도 남겨놓았을 때였다. 아내는 손자가 사과를 좋아한다면서 마트에 가서 좋은 걸로 두 상자만 사다 놓으라고 해서 그대로 했다. 그런데 추석이 가까워오면서 두 상자가 선물로 들어왔다. 배도 감도 포도도 한과도 사다놓으라고 해서 그대로 했다. 본인은 한개도 들지 못하고 떠났다. 거실 한 구석에 쌓여 있는 걸 보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동반자를 먼저 보낸다는 게 이렇게 큰 시련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나는 이성보다는 감성이, 감성보다는 영성이 깊은 편인 것 같다. 그래서 내 자신 생각해봐도 마음이 여린 편이다.

일찍이 생전에 어머니께서 내게 하신 말씀이 있다. “자네는 성정이 너무 여려서 남한테 속기 쉬울 것 같으니 무슨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예수님이라면 이럴 경우 어떻게 하실까’ 라고 자문하고 행동하라”고 하셨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어보면 인간에게 시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어보면 누구나 ‘인간에게 시련은 왜 닥치는 것일까’라는 등의 질문이 나오게 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중 한 사람이 들려주는 당시 상황이 주제인 이 책은 수감자들의 내면심리 분석을 위주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모습을 진솔하게 그리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시련이란 어려운 고비나 난관을 의미한다. ‘시련이 인간 삶에 의미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분분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누구에게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시련이 찾아온다는 점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시련도 있지만, 사회생활을 하다가 보면 앞길이 막힌다든가 하는 시련도 있고, 나처럼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그리워서 겪는 삶의 시련도 있을 수 있다.

나는 일제 치하에서 태어나 해방과 6.25전쟁, 4.19, 5.16을 거치며 살아왔다. 마음씨 착하고 생활력 강한 아내를 만나 분에 넘치게 고생 모르고 살아왔다. 내가 정론직필을 외치며 실천했고, 후학들을 가르치고 나라를 걱정하고 했던 이 모두가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 덕분에 가능했다. 그래서 그 빈자리가 더 넓고 허전하다.

그간에도 이보다 작은 시련들이 없었던 게 아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내가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아내가 용기를 북돋아 주었기 때문이다. 시련, 고난, 역경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내면의 자아와 소통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내적 사고를 수행함으로써 한층 더 성숙해 질 수 있다고도 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동반자를 잃는 시련을 이겨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

혹자는 말한다. 시련을 이겨내려는 노력을 하다보면 마침내 그 난관을 넘어선다면 새로운 자신의 성숙된 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들이 얻어야 하는 지혜는 인간에게 시련은 있게 마련이고, 그 시련을 극복할 때 인생은 성공하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모두 맞는 말이다. 다만, 그것을 알기까지의 기간이 문제다.

 

#대한언론인회, 

저작권자 © 최보식의언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