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고등학교에 가면, 인생의 행로에 있어 보물과도 같은 이정표 말씀

강호논객 신광조

거창고등학교는, 경남 거창에 위치한 미션스쿨이다.

거창교교는 625 동란이 끝날 무렵, 몇 분의 선생님들이 뜻을 모아 세운 학교다. 1955년 초대 교장 김용해 선생님을 필두로 같은 해 임길용 선생님이 직접 교가를 작사 작곡하고 학교의 틀을 갖추었다.

그 뒤 신중학 교장 선생님께서 갖은 노력을 다하였지만 빚만 지고, 1956년 봄에 학교운영권을 3대 교장으로 취임하신 전영창 선생님에게 드리고 물러났다.

전영창 선생님은 대한민국 1호 국비유학생으로 미국 유학을 다녀오셨다. 한국으로 귀국하시면서 서울의 유명 대학 부학장자리도 마다하고 시골 거창의 쓰러져가던 학교를 인수받으셨다.

미국과 네덜란드 등의 기독교 단체로부터 모금을 통하여 학교 운영을 정상화하고, 직접 학생들과 벽돌을 찍어 교사(校舍)를 건축해 가면서 공부를 가르쳤다.

전영창 선생님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함을 실천한 분이셨다.

거창고등학교 도약의 큰 계기가 되었던 게, 네덜란드 교회연합회 후원으로 설립된 직업보도관이었다. 직업보도관은 인쇄 사업 등을 통한 수익 창출로 학교 운영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직업보도관 개관식 준비로 과로한 전영창 선생님은 197659세에, 담석증과 패혈증으로 대구 동산병원에서 소천하셨다. 장례식이 거창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있었는데, 거창군민은 모두가 다 와서 울었다고 한다.

거창고등학교는 지금도 공부를 잘하지만, 1960~70년대 전국에서 거창고교로 유학을 보내고 싶은 학부모들이 많았다. 한 학년 4학급 230명 정도에, 한 해 서울대를 20명 이상 합격시키곤 하였다.

거창고교가 유명한 것은 대학입시를 위한 학과 공부뿐만 아니라, 문학 음악 미술 체육 연극 등의 교육을 가장 잘 시켰던 학교였다.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도 강조하셨던, “국영수가 진짜 교육이 아니고 음미체가 진짜 교육이다.”는 생각을 실천한 학교가 거창고교인 듯하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 시절, 거창고교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전영창 선생님의 아들 전성은 교장선생님이었다.

새벽이면 전성은 선생님이 쓴 글을 찾아 읽곤 한다. 선생님의 글은 무수히 많은 유혹의 순간들을 피해갈 수 있도록 해주고,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고, 그만큼 타인들도 사랑하게 해주었다.

꿈속에서라도 선생님을 만나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타인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라는 준엄한 명령을 내리곤 하신다.

거창고등학교에 가면, 인생의 행로에 있어 보물과도 같은 이정표 말씀이 있다. 강당 뒷면에 걸려있는 직업선택 십계명이다.

전영창 선생님이 평소에 강조하시고 행동하셨던 것들을, 전성은 선생님과 도재은 선생님이 10가지로 정리한 것이다.

1계명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계명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계명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계명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계명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계명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계명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은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계명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계명 부모나 아내가 약혼자가 반대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계명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나의 아들딸은 수긍을 않겠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말들이 일리가 충분히 있다는 것을 경험 측으로 알았다.

김남국은 끝났다. 그가 조금이라도 십계명 이런 말들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알려고 했더라면 그의 인생이 이렇게까지 허무하고 불쌍하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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