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강수연 유작 ‘정이’..공개 하루만에 세계 1위
당차고 예뻤던 고인을 아낀 거장 임권택은 "좋은 얼굴을 가졌다...내 영화가 빛났다"고 회고했다
최영훈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정이’가 공개 하루 만에 글로벌 정상에 올랐다.
넥플릭스 패트롤은 ‘정이’가 영화 부문 세계 1위를 기록했다고 22일 밝혔다. 한국을 비롯해, 미국 브라질 베트남 스페인 등 31개국에서 정상을 차지했다. 평점 685점으로 2위 미국 ‘우리집 개를 찾습니다’(439점)와 격차가 컸다.
‘정이’는 연상호의 SF 작품으로 20일 공개됐다.
2194년 인류는 기후변화로 폐허가 된 지구를 벗어나 우주 ‘쉘터’로 이주한다. 내전이 일어나, 사람들은 전설적 용병 ‘정이’의 뇌를 복제한 A.I.를 개발한다. 영화는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을 다룬다.
배우 김현주가 정이 역을 맡아 인간과 인공지능 두 가지 모습을 연기했다. 드라마 ‘지옥’에 이어 연상호 감독과 재회한 류경수는 연구소장 ‘상훈’으로 나온다. 강수연은 연구소에서 개발에 몰두해 있는 팀장 윤서현으로 생전에 열연했다. 엔딩 사인으로 고 강수연 배우를 추모한다는 글이 떠 새삼 고인이 생각난다.
SF 영화는 내 취향에 별로 맞진 않지만, 그런대로 볼거리가 풍부해 볼만하다.
‘정이’는 작년 세상을 떠난 강수연의 유작이기도 하다.
월드스타였던 고인은 작년 5월 5일 뇌출혈로 인한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의식을 못 찾고 이틀 뒤 끝내 별세했다.
강수연에게 ‘정이’는 2013년 단편영화 ‘주리’ 이후 9년 만의 복귀작이었다. 촬영을 마치고 스크린 복귀만을 남겨뒀던 탓에 팬들의 안타까움은 더 컸다.
비보가 들려온 날 연 감독은 페북글로 고인을 ‘한국영화 그 자체였던 분’이라고 추억했다.
“선배님 편히 쉬세요. 선배님과 함께한 지난 1년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라고 애도했다.
연 감독과 출연 배우들은 고인과의 추억을 최근까지도 회상했다고 한다.
“윤서현이라는 인물을 누가 연기할 수 있을까...갑자기 강수연 선배 이름이 떠올랐고,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연상호)고 했다.
고 강수연이야말로 넷플릭스 정상에 오른 이 영화 제작-기획의 원동력이었다.
“선배님을 처음 뵙던 날이 아직도 기억난다. 현장에서는 선배, 어른이 아니고 그냥 동료였다. 누구보다 진지하셨고 열정적이셨다.”(김현주)
넷플릭스는 '정이' 공개 기념으로, 그의 출연작 '씨받이'와 '경마장 가는 길' 서비스를 시작했다. 영상자료원과 협업, 시청자들이 강수연의 대표작 두 편과 최신작을 동시에 만날 수 있게 했다.
'씨받이'는 거장 임권택 연출로, 열연한 강수연은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유교 질서가 지배하던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양반 집의 대를 잇기 위해 대리모인 ‘씨받이’로 들어가게 된 주인공이 겪는, 시대가 허락하지 않은 사랑과 운명을 그린 영화다.당시 파격적 미장센과 공고한 신분 질서에 맞서는 주인공을 아름답고 처연하게 그렸다. 아시아권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강수연은 '씨받이'로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1991년 개봉작인 장선우 감독의 '경마장 가는 길'은 당시로선 금기시된 소재였다. 성 담론과 지식인의 이중성을 도발적으로 제기해 문제작으로 떠올랐던 작품이다. 포스트모더니즘 붐을 일으켰던 하일지 원작의 ‘경마장 가는 길’을, 영화계에 새 바람을 일으킨다는 호평의 장선우가 메가폰을 잡아 화제를 일으켰다. "너의 이데올로기는 무엇이냐"는 대사와 함께, '경마장 가는 길'은 새 스타일과 개성적 캐릭터, 파격적 스토리로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상찬을 받았다. 강수연은 '경마장 가는 길'로 백상예술대상, 청룡영화상, 춘사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석권했다. '정이'로 강수연을 만난 뒤 에너지와 매력,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20대 강수연을 만날 기회다.
"내가 먼저 죽어야 하는데 훨씬 어린 사람이 먼저 가니까…. 좀 더 살면서 활동도...아깝죠."(임권택)
당차고 예뻤던 고인을 아낀 거장 임권택은 "좋은 얼굴을 가졌다...내 영화가 빛났다"고 회고했다.
며칠 전, 지방에서 올라오는 길에 집으로 가 임 감독을 만났다. 약속시간이 빠듯해 얼굴만 보려 했으나 붙들려 타준 녹차를 몇 잔 마셨다. 거장의 얼굴 빛은 작년에 뵙을 때보다는 훨씬 밝고 좋아진 듯했다. 작년 추석에 이어 올 설에도 부인 채령씨와 함께 강수연이 영면한 곳을 찾아갔을 거다.
강수연은 생전에, 현장에서 치열하게 스태프들과 배우를 응원하는 똑 부러진 여자였다.
그래서 "지나치게 똑소리가 나 많이 외로웠을 것 같다. 너무 잘나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많은 영화인들과 팬들은 고인의 이 말을 잊지 못할 것이다.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