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성처럼 나타난 이분들 투쟁이 데모 바닥에 신선한 '영감'을 주었다죠
좌파 운동가들이 주장하는 ‘탈시설 운동’은 지금 한국 현실과는 하나도 안 맞습니다. 생각해보세요. 한국의 아파트를 ‘성냥갑’이라고 놀리면 요새 그게 먹힙니까. 요즘 신축 아파트는 그 자체로 시민공원이요 커뮤니티이고 높은 생활 수준의 상징입니다
강호논객 배재희
요새 이준석 대표와 격하게 대립하는 전국장애인차별연대(전장연)는 옛날에 '버스를 타자'는 어마어마한 ‘이동권 투쟁’으로 이목을 끌었습니다. 당시엔 정치판, 노동계 데모꾼들이 주도하는 사회운동들이 회의에 젖어있던 시절이었어요. 근데 혜성처럼 나타난 이분들 투쟁이 데모 바닥에 신선한 '영감'을 주었다죠.
그 당시 필름을 보면 엄청납니다. 입이 쩍 벌어집니다. 철제사다리에 몸을 묶고는 그대로 지하철 레일에 드러누워 버리고, 긴 휠체어 이용자들 행렬이 버스 타겠다면서 승차줄을 점거해버리고. 근데 당시에는 도덕적 울림이랄까요, 수긍되는 게 많았습니다.
혹자에겐 센세이션, 혹자에겐 악명높은 운동. 제 마음이야 늘 전자였습니다. 저도 그 무렵엔 꽤 급진적인 아이였고, 지금도 그런 도덕적 의분은 맘 한 켠에 항시 자맥질합니다.
그 시절 일곱 명인지 여덟 명인지 지하철 리프트에서 추락사했거든요. 리프트 대신 엘리베이터 만들라는 게 참담하고 절박한 요구였습니다. 게다가 엘리베이터는 장애인만을 위한 게 아닌 모든 이용객들 편의를 위해서도 유익한, 이른바 '보편적 설계'(universal design)의 상징 같았거든요.
그런데 전장연의 이번 데모는 실상을 들여다보면 납득이 안 됩니다. 명분도 방식도 기이해요. 서울 지하철은 이미 대부분 엘리베이터 설치됐거든요. 소위 '보편적 설계'(universal design)라고 하죠. 신체 장애인만이 아닌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모두를 위한 시설설계 운동의 상징이 엘리베이터입니다.
일부에서 사유지 토지 수용이 잘 안 되었거나 건물의 구조적 결함 때문에 설치 진행 중인 거 빼고는 다 완성됐어요. 근데 전장연이 왜 저럴까 궁금하여 들여다보니, 실상 데모 내용은 딴 데 있더군요. ‘이동권 이슈’가 본질이 아니었어요.
소위 '탈시설 예산'이라는 수천억에 달하는 예산을 보장하라는 명목입니다. ‘탈시설 운동’이란 장애인들이 보호시설에서 벗어나 각자 일반인처럼 살아가게 하고 이에 필요한 서비스를 국가가 제공하라는 겁니다.
그런 장애인 복지예산의 요구 투쟁이라면 보건복지부를 점거해야지, 왜 지하철을 세울까 의아합니다. 이런 와중에 실상을 모르거나 약자 편 이미지를 보여줘야 할 국회의원들은 정작 본인들은 지하철 타지도 않으면서 자애로운 양 벌벌 떱니다. 솔직히 보기 안 좋습니다.
장애복지학에 소위 3대 이념이란 게 있어요. 정상화, 주류화, 탈시설화. 다 미국서 만들어진 건데요. 20세기 들어 많은 성찰과 논란, 갈등들 속에 조형된 이데올로기죠.
특히 ‘탈시설 운동’은 1960년대 '크리스마스의 충격'이라 불린 장애인 시설 실태 르포기사가 도화점이었습니다. 그 당시 미국의 장애인시설은 ‘아우슈비츠’로 불릴 만큼 충격적이었다고 해요. 뭐 우리도 마찬가지였죠. 장애인 시설의 의문사, 학대, 기부금 횡령 이런 건 뉴스 보도의 단골 꼭지였으니까. 지금도 종종 그렇고.
‘탈시설’은 하나의 거대한 명분론이자 이데올로기입니다. 환경론자들의 탈원전 운동 같은. 문제는 항시 먼 곳을 향하는 이데올로기들이 당면한 현실의 인간을 괴롭고 불편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다 모순이죠. 인간을 위한다는 이념이 결국엔 인간을 이념을 위해 채워 넣는 땔감으로 쓰고 만다는 것. 그래서 이상론자들일수록 당면한 현실에 뿌리박은 사고를 해야 한다죠.
‘탈시설 운동’은 그 주장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상 장애인들에게 더 피해를 끼칠 수 있는 겁니다. 좌파 운동가들 요구대로 시설에서 해방(?)된 무연고 장애인들이 얼마 못 가 집에서 시들시들 사망해 버린 사례, 시설을 떠나 결국엔 정신병원에 들어간 사례 등을 듣고 눈시울이 붉어진 적 있습니다. 드높고 위대한 구호 아래 남루한 본색을 감춰두죠.
좌파 운동가들이 주장하는 ‘탈시설 운동’은 지금 한국 현실과는 하나도 안 맞습니다. 생각해보세요. 한국의 아파트를 ‘성냥갑’이라고 놀리면 요새 그게 먹힙니까. 요즘 신축 아파트는 그 자체로 시민공원이요 커뮤니티이고 높은 생활 수준의 상징입니다.
마찬가지예요. 장애인 시설을 ‘판 옵티콘’ 같은 감시 감옥인양 묘사하는 것, 거의 거짓말에 가깝습니다, 요새 비장애인들도 존엄한 노후를 영위하려고 잘 차려진 요양병원에 들어가려는데. 오히려 중증 장애인들을 시설에서 나오게 하는 게 말이 됩니까.
학문적으로 업데이트 안 된 늙은 교수들, 탈시설을 명분으로 재가(在家) 장애인 관련 사업권 노리는 자들의 캠페인이랄까요. 전에 어디선가 탈시설 수기 공모전도 벌였던 거도 기억나네요. 하여튼 뭐든 악마화하고 몰아가는데 탁월한 사람들입니다.
제 아내가 장애인시설에 파견되어 학생들 가르치고 있어요. 평생 무학으로 산 오륙십대 장애 노인들에게 ‘가나다라, 1,2,3,4’를 가르쳐 초등학교 졸업장을 따게 합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데요. 박경석 전장연 상임대표처럼 ‘장애인 야학’ 명분으로 데모꾼들 양성하는 것만이 교육이 아니란 말입니다. 데모 현장의 붕 떠있는 언어와는 다른, 사람의 숨결이 느껴지는 단어가 ‘인권’입니다.
아내가 ‘탈시설 운동’ 얘기 듣고는 대뜸 말하더군요.
“말도 안 돼요. 요즘 시설이 얼마나 좋은데. 대기업 직원들이 종종 와서 마술쇼도 해주고 멋진 군인 아저씨들이 병영 캠프도 열어주고. 얼마나 재밌는데. 시무룩한 어르신들이 그때만큼은 얼마나 행복해하는데요.”
소박한 인상평 같지만 이 말 안에 저는 ‘탈시설 운동’의 허구성, 한발 더 나아가 위험성이 설명된다고 봅니다. 탈시설이라는 허구의 이념에 인간을 꿰맞추는 ‘프로크루테스의 침대’ 같은 거요.
하여튼 여성계와 실제 한국의 여성들 삶이 전혀 무관하듯, 장애운동가들과 실제 장애당사자들의 삶은 다릅니다. 특히 전장연 일파와 과격한 그 후원자들이 실제론 시설 장애인들의 삶을 망가뜨리고 그들이 고향 같은 공동체를 빼앗고 있다는 것, 우리가 더 매서운 눈으로 감시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