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나눠주는 맛’에 취한 권력... 법조계 거물은 왜 법조계 원로를 겨눴나

2026-04-01     엄상익 논설위원

[최보식의언론=엄상익 논설위원]

포스코빌딩 앞 조형물 '아마벨'. 사진 포스코그룹

포스코빌딩 앞 광장에 고철 조각품이 서 있었다. 프랑스 작가가 만들었다는 그 작품을 두고 한때 철거 논쟁이 있었다. 도시의 흉물이라는 비난과 예술이라는 옹호가 맞섰지만, 결국 그것은 그 자리에 남았다.

나는 그 앞에 서서 한참을 올려다보았다.

녹슨 쇠붙이들이 비틀리고 얽혀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무엇을 형상화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 눈에는 그저 비를 맞고 녹슬어 가는 고철 덩어리로 보였다.

'이게 뭐야. 쓰레기잖아.'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나는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분명히 내 안에서 들렸다. 제주도 묘지에서 느꼈던 그 차가운 기운이 가슴속에서 퍼지는 느낌이었다.

허상철 옹 같았다.

그가 내 안에서 이 조각품을 보고 있었다. 수백 억을 들여 만든 그럴 듯한 외양. 그러나 속은 텅 빈 쓰레기. TBS 허상철 복지재단이 바로 저런 것이 아닐까.

나는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 중식당으로 올라갔다. 직원이 창가의 조용한 방으로 안내했다. 대형 유리창 아래로 테헤란로의 자동차들이 끝없이 흘러갔다. 마치 돈의 흐름 같았다. 욕망의 물결 같았다.

'저것들이 다 내 돈을 노리고 있어.'

또 그 목소리였다.

나는 창가에 서서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차들의 움직임이 개미떼 같았다. 허상철 옹의 영혼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이 탐욕과 허영의 도시를 방황할까.

"엄 변호사님."

문이 열리고 우창록 변호사가 들어왔다.

율촌의 대표였다. 수백 명의 변호사가 뛰는 국내 최대 로펌 중 하나. 중후해 보이는 비둘기색 재킷을 입은 그가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둥근 원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종업원이 백자 주전자를 들어 하얀 컵에 차를 따랐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어떻게 그렇게 고시에 빨리 합격하셨습니까?"

내가 마음의 빗장을 열기 위해 먼저 물었다.

"1974년에 고시 합격기를 썼다가 된통 욕을 먹었습니다."

"왜요?"

"고시 합격은 완성이 아니라 출발이라고 했다가 말입니다."

그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판사는 안 하셨죠?"

"사법연수원 입소식 때 법원장과 원로 판사들 얘기를 들으면서 실망했습니다. 세상에 대해 너무 보수적이고 소극적이더군요."

그는 일찍부터 남다른 눈을 가졌던 모양이다.

"지금은 대형 로펌의 대표이신데, 어떻게 그렇게 키우셨습니까?"

"처음부터 이런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냥 하다 보니 이렇게 됐죠."

겸손했다.

"제 경우는 변호사들 관리하는 일보다 사건 자체가 재미있습니다. 마지막까지 은퇴하지 않고 변호사 일을 할 겁니다."

그가 왜 성공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일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종업원이 삭스핀이 담긴 하얀 도기를 소리 없이 놓고 갔다. 하얀 그릇 안에 반투명한 지느러미가 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상어 지느러미. 최고급의 요리'

허상철 옹은 이걸 먹어봤을까. 그는 돈이 많아도 거지였다. 다른 사람의 식탁에 남은 소주를 슬쩍 가져다 마셨다.

"허상철 재단 얘기를 해주시죠."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우창록 변호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허상철 옹의 기부로 만들어진 재단이라면 기본적으로 고인의 유지가 받들어져야 합니다."

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고인의 유지는 복지시설을 운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첫걸음은 소박하게 시작해도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을 멈추고 잠시 찻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판사 출신인 오석민 이사장은 허상철 옹의 뜻을 무시했습니다. 극히 형식적인 논리로 말입니다. 복지시설을 하려면 정관을 변경해야 한다면서 말이죠. 정관은 얼마든지 변경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또 자금이 부족하다고도 했죠."

"사업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거액의 세금이 부과됐는데 그 책임은요?"

"오석민 이사장이 사퇴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물러나면 재단이 존재할 수 없다면서 버텼습니다."

우 변호사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터무니없는 얘기죠. 다른 사람이 이사장이 돼도 재단은 얼마든지 유지될 수 있습니다. 사실 거액의 세금이 나온 데 대해 오석민 이사장은 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조금만 신경 써서 복지시설을 위해 땅이라도 파 놓았다면 그런 세금은 부과되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품었던 의문을 꺼냈다.

"오석민 씨는 도대체 왜 그렇게 이사장 자리에 연연합니까?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닌데요."

우변호사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돈을 나눠주는 맛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

"거액의 돈을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것. 그게 얼마나 달콤한 권력인지 아십니까?"

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오석민 이사장은 그 권력의 맛을 본 사람입니다. 돈을 나눠주는 데서 오는 기쁨. 그건 때로 소유하는 기쁨보다 더 큰 쾌락을 줍니다."

'내 돈으로... 내 피 같은 돈으로...'

허상철 옹의 목소리가 내 안에서 울부짖는 것 같았다. 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화가 치밀었다. 내가 분노하는 건지 허상철 옹이 분노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정말 대가 없이 순수하게 이사장 일을 하는 경우는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우창록 변호사가 말을 이었다.

"오석민 씨는 사퇴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자기를 지지하는 이사들을 움직여 투표로 밀어붙였습니다. 저는 이사로서 분명히 반대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싸움의 주체는 우 변호사다.

"그렇다면 로펌의 대표이시면서 직접 싸우시지 않고 왜 저 같은 사람을 등장시키십니까?"

"저는 재단의 현직 이사입니다. 그리고 오석민 이사장은 법조계의 원로입니다. 예전에 같이 일한 적도 있고요. 직접 부딪치기 곤란한 면이 많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석민 이사장은 고등학교 선배이십니다. 제가 나서면 동문 사회에서 매장당할 겁니다."

우변호사가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엄 변호사님은 그런 인연 따위 가리지 않고 싸워오지 않으셨습니까? 허은정 교수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내가 그런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던가.

'싸워주쇼. 종 간나새끼들 하고.'

허상철 옹의 목소리가 또 들렸다. 함경도 출신 할아버지가 흔히 쓰던 욕이었다.

나는 법리 얘기로 넘어갔다.

"이 사건은 결국 오석민 개인의 불법행위로 구성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공익법인 이사장의 잘못을 인정한 판례가 없습니다. 어떻게 이론 구성을 해야 할까요?"

우창록 변호사가 수첩을 꺼내면서 말했다.

"민법학자 곽윤직 교수는 프랑스 민법이나 독일 민법의 경향대로 사회적 규범을 벗어나거나--"

내 속에서 허상철 옹이 소리쳤다.

'저 도둑놈들 사기꾼을 두고 무슨 개똥같은 소리지?'

우 변호사가 수첩에 시선을 두고 말을 계속했다.

"보호할 가치가 있는 이익을 침해하면 불법행위가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수첩을 덮고 나를 보았다.

"프랑스 민법 제1382조를 보면 '잘못'이라는 포괄적 개념을 사용합니다. 의무 위반이 있으면 법적 책임을 묻는 거죠."

"그렇다면 TBS는 어떤 불법행위를 저질렀다고 보십니까?"

"TBS는 자신의 자회사 같은 재단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정관에 방송 제작비로 기부받은 돈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가 나를 똑바로 보았다.

"돈이 흐르는 파이프를 자기들 쪽으로 바꿔버린 겁니다. 결국 병중인 노인의 무식과 착각을 이용한 사기였습니다. 얼핏 보면 공적 기관의 실정법규에 맞는 그럴 듯한 외형이죠."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한번 싸워서 판례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이미 법적 논리를 치밀하게 구성하고 있었다. 승산이 있다는 소리였다.

나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었다.

"우 변호사님이 뒤에 숨지 말고 저와 함께 싸워주실 수 있습니까?"

그가 잠시 침묵했다. 그 눈빛에 여러 생각이 담겨 있었다.

"그러시죠."

"이 일은 법정만 가지고 안됩니다. 언론도 동원하고 서명운동도 해야 합니다. 복합적인 투쟁을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동의합니다."

"우 변호사께서 전직 이사들을 모아서 서명운동을 전개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리는 악수를 나누었다.

그의 손이 차가웠다. 아니, 차가운 건 내 손이었다. 제주 묘지에서 느꼈던 그 차가움이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었다.

나는 전사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 두 명의 전사였다.

살아 있는 변호사 하나와 죽은 허상철 옹.

우리는 함께 싸울 것이었다.

빌딩을 나와 다시 고철 조각품 앞을 지나갔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석양빛이 녹슨 조각품을 붉게 물들였다. 차가운 쇠 위에 앉아 있던 까마귀 한 마리가 하늘로 날아 올랐다.

'다 작살을 내 버려주슈.'

허상철 옹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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